꽃시집『금강초롱』(2013) 119

꽃무릇, 꽃을 위하여

꽃무릇, 꽃을 위하여 洪 海 里 한겨울 내내 눈감고 누워 허위허위 널 기다린 겨운 세월이었다 너는 어디쯤 오고 있는가 텅 빈 지상은 햇빛 찬란한 지옥이구나 몇 번이나 달이 부풀었는지 그러다 소리 없이 봄날이 갔다 기다리는 것이 사랑이라고 뜬눈의 한 생 목탁소리 한 번 들은 적 없으나 절명의 삶은 결코 죽은 것이 아니지만 나 없는 세상 푸른 울음 사라지고 가을이면 통곡 같은 불꽃으로 넘쳐나리라 때늦게야 솟아오를 널 참지 못하고 내가 떠난 세상 부디 극락이거라 올해도 하릴없이 나 돌아간다, 이제 겨우내 탈옥을 꿈꾸던 외로운 잠에 들리라 영원히 못 이룰 상봉의 천년 꿈을 위하여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온다.

벼꽃 일다

벼꽃 일다 洪 海 里 벼꽃 이는 걸 보셨는가 벼도 꽃을 피운다는 걸 아시는가 아침나절 씨껍질 슬그머니 열고 암술 수술이 만나, 자릿자릿 짝짓기를 하고 슬그머니 문을 닫는다 그래야 알이 차고 여물어 밥이 되는 것을 아시는가 벌써 푸른 논에서는 햅쌀밥물 잦히는 냄새가 난다 새 보는 할아버지 새참 이고 나온 어머니 막걸리 따르는 소리 물꼬에 물 드는 소리 내 입으로 들어갈 밥이다 나의 생명이다 내가 가야 할 길이고 역사다 벼꽃은 질박의 극치, 수줍음 많은 벼가 자지를 내밀고 있다 지금 한창 일고 있다.

목백일홍

목백일홍 洪 海 里 어디선가 배롱배롱 웃는 소리 들렸다 해질녘 저 여자 홀딱 벗은 아랫도리 거기를 바람이 간지럼 태우고 있었다 깔깔깔 서편 하늘로 빨갛게 오르는 불을 끄려 제 발 저린 바람은 손가락 볼우물을 파고 제 마음 뜸들일 새도 없이 추파를 흘리는 여자 자리자리 꺄륵꺄륵거리며 포롱포롱 날아오르는 저 여자 엉덩이 아래 깔리는 그늘도 빨개 몸이 뜨거워져 설레는 것은 내가 아니었던가 나 아니었던가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