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치과에서

치과에서 - 치매행致梅行 · 331 洪 海 里 아내는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살자고 새 치아를 해 넣다니 뼈를 파고 쇠이빨을 박다니 내가 인간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공간시낭독회 2020. 9월. 제482회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 성찰의 의미를 짙게 새긴 시네요. 이미『치매행致梅行』 시집을 발간한 바 있고, 이 연작시를 끊임없이 써서 331편에 해당하는 이 시를 통해, 치매에 걸린 아내를 두고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시상이 너무 진솔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네요. 요즘엔 누구나 쉽게 하는 임플란트 기술에 의해 이빨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요. 하지만 화자 는 아내의 처지에 비추어 치아의 건강을..

초아흐레 달

초아흐레 달 - 치매행致梅行 · 395 洪 海 里 기해己亥 삼월 초아흐레 그믐달도 아닌데 초저녁 마당에 나가 올려다보는 달 두 눈에 원망이 그렁그렁하다 울음이 눈물이 두 눈에 얼굴에 크렁크렁하다 아무것도 아닌 여자 그냥 여자인 여자 혼자 울고 있었다 차마 따라 울지 못했다 형이하학적인 슬픔인가 평생 혼자 살 듯했으니 외로운 걸 알 리가 있겠는가 한때는 타오르는 아궁이였고 차오르는 샘물이었지.

눈썹잠

눈썹잠 -치매행致梅行 · 393 洪 海 里 새벽 두 시 기저귀 갈아 주려 불을 켰더니 아내는 혼자서 웃고 있었다 싱글벙글 어둠 속에서 벌써부터 웃고 있었다 "왜 안 자고 있었어?" 그래도 아내는 벙글벙글 웃었다 소리 없는 웃음이었다 아내의 나라는 어떤 곳일까 말을 잊은 세상은 어떤 나라일까 아내와 둘이서 있는 밤 눈썹 위에서 잠이 잠깐 놀다 가곤 했다 이름하여, 눈썹잠 또는 눈꺼풀잠이라고나 할까 노루잠이 바른 말이나 쪽잠은 어떤가 2019년 4월 7일의 일이다 꿀잠은 못 자도 잘 때 푹 자야 하는데 깨지 않으면 영영 끝인 영원한 잠[永眠]인 것이 인생인가!

노망老妄

노망老妄 - 치매행致梅行 · 394 洪 海 里 노망이 무엇인가 로망이라면 좋으련만 노망들고 노망나서 삶의 무게가 다 빠져나갔다 부모는 자식에게 자식은 부모에게 무엇인가 다 익은 열매는 떨어져 나가기 마련 세상엔 부부밖에 없다는데 따뜻한 나라는 어디 있는가 기억이 사라진 나라 텅 빈 허깨비들이 말없이 헤매는 곳 속수무책의 천지가 아닌 사람 사는 세상은 어디 있는가.

호사로다

호사로다 - 치매행致梅行 · 344 洪 海 里 호사로다 호사로다 내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될까 몰라 울음도 사치 눈물도 사치 내게 이런 사치가 치사하지 않나 막막이 막막하게 꽃불처럼 피고 적적이 적적하게 불꽃으로 지는 적막의 세상인데 니가 치매를 알아? 앓아 봐, 한번! 쓸쓸한 밥이 홀로 울고 있는 세상 별것 아닌 환자로 쇼한다고? 시든 꽃밭이라고 불 지르지 마라 막차가 끊기면 너 또한 막막하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