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허허虛虛

허허虛虛 - 치매행致梅行 · 342 洪 海 里 아등바등 살아온 한평생 쪼글쪼글 말라붙은 빈 젖처럼 적막하다 허허 적적 허허 막막 쓸쓸한 텅 빈 들판 바라보는 내 온몸이 시리다 묵은지처럼 아득하기 짝이 없다 저릿저릿 은결든 가슴에 소름이 돋는다 그래도 눈빛은 숫눈길이라서 "잘 잤어? 배고프지?" 메아리 없는 내 말만 공허하다.

꽃은 아프다 하지 않는다

꽃은 아프다 하지 않는다 - 치매행致梅行 · 343 洪 海 里 오래 전 꽃을 보고 "아프다는 말 하지 마라 그 말 들으면 나도 아파 눈물이 진다" 했는데, 무슨 인연인지 우연인지 그 해부터 아내는 아파 누워 있다 아픈지도 모른 채 누워만 있다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데 서 있는 내가, 내가 아프다 아내는 꽃인가, 아닌가?

안에만 있는 아내

안에만 있는 아내 - 치매행致梅行 · 341 洪 海 里 움직이지 않는 그림자가 있습니다 아내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입니다 일흔여덟의 남편도 살고 싶은데 칠순의 아내는 어떻겠습니까 그러나 그것인들 아내는 알고 있는지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는지 그것조차 알 길이 바이없습니다 이제까지 많은 이들이 곁을 떠났습니다 할머니 아버지 할아버지 어머니가 가시고 이웃들 선배 친구 후배들까지 순서 없이 앞서서 이승을 떠나 버렸습니다 혈연의 질긴 끈을 끊고 학연이나 지연의 사슬을 풀고 떠나갔습니다 우연이나 필연으로 맺어진 인연도 잊고 언젠가는 나도 그 뒤를 따라갈 것입니다 아내도 말없이 저세상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종일 자기 안에만 있는 아내 곁에서 이승을 떠나 저세상으로 가는 것이 아무런 미련이 없는 안식일까 자유요 해방일 ..

아내의 생일

아내의 생일 - 치매행致梅行 · 336 洪 海 里 9월 6일, 음력 칠월 스무이렛날 아내의 생일인데 오늘이 칠순인데 아내는 이것도 저것도 모릅니다 생각해 보면 엊그젠데 참으로 먼 길이었습니다 아내의 길은 돌아 돌아서 매화 피는 마을까지 다시 먼 길을 가고 있는 아내의 나라 오늘을 접으면 내일이 펼쳐지고 매화가 질 때가 되면 길이 끝날지 모릅니다 왜 그리 살았던가 왜 그리 살고 있는가 누가 알 수 있었으랴 고희 인생이 이리 허망한 탑일 줄을! 이쪽 세상은 환한데 저쪽은 어둡고 적막하기 짝이 없습니다.

시간은 제자리

시간은 제자리 - 치매행致梅行 · 332 洪 海 里 누워 있는 아내를 내려다보면 두 눈에 고요한 원망이 그렁그렁 망연하다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바람이 와서 운다 산 하나 넘고 나면 더 높은 산이 막아서고 강을 건너면 또 다른 강이 검푸르게 넘실거린다 어쩌자고 시간은 아득바득 흘러가는가 시간은 제자리인데 내가 무턱대고 흘러가는 것은 아닌가 그리운 항구도 없고 즐거운 술집도 없는 살아 있는 무의식이 있을 뿐 의식은 어디로 갔나 내 영혼의 아들마늘은 어디 있는가 "동생이 살았으면 좋겠다가도 때론 죽는 게 나을 거란 생각도 든다." -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길버트의 혼잣말.

부부별곡

부부별곡 - 치매행致梅行 · 388 洪 海 里 누가 누구를 두고 먼저 갈 것인지 누가 알 수 있으랴마는 보내는 연습을 해야 하나 떠나는 훈련을 해야 하나 웃음도 다 접어 두고 울음도 다 버려 두고 가야 할 때 조용히 떠날 일 아닌가 말없이 보내 주어야 될 일 아닌가 아파도 아픈지도 모르고 고파도 고픈지도 모르는 말도 못하는 사람 홀로 두고 어이 떠날까 여태껏 쌓인 마음고생 몸고생 백번 생각해도 아무것도 아니지 옆에 누가 있어도 홀로인 세상 혼자 있는 자리 얼마나 외로울까 다 놓고 버린 고독단신의 고독지옥이라는 오늘이여 차마 못할 말, 차마 못할 일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