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시를 찍는 기계

시를 찍는 기계 - 치매행致梅行 · 346 洪 海 里 "마누라 아픈 게 뭐 자랑이라고 벽돌 박듯 시를 찍어내냐?" 그래 이런 말 들어도 싸다 동정심이 사라진 시대 바랄 것 하나 없는 세상인데 삼백 편이 넘는 허섭스레기 시집『치매행致梅行』1, 2, 3집 아내 팔아 시 쓴다고 욕을 먹어도 싸다 싸 나는 기계다 인정도 없고 사정도 없는 눈도 없고 귀도 없는 무감동의 쇠붙이 싸늘한 쇳조각의 낡은 기계다 집사람 팔아 시를 찍어내는 냉혈, 아니 피가 없는 부끄러움도 창피한 것도 모르는 바보같이 시를 찍는 기계다, 나는! - 포켓프레스 2019. 12. 23. 게재. * 감상. 화사하던 시절에는 눈이 멀었지. 이제는 바라보는 것만으로 부서질 것 같아 차라리 눈을 감네. 눈을 감으면, 말 없는 말이 당신 얼굴에 피어나..

밝은 절망

밝은 절망 - 치매행致梅行 · 340 洪 海 里 가장 시시한 것이 위대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전부인 걸 알기까지 얼마나 긴 세월이 흘렀던가 검정 고무신이 명품 수제구두보다 더 좋았던 시절이 있었지 이렇듯 절망도 때로는 환해서 날 일으켜 주는 힘이 되나니 울지도 못하는 아내 몸과 마음 모두 은결들어서 반비알진 채 누워 있고 가라지 꼴이 된 내가 그 곁을 지키네 그래도 봄이 오면 눈이 녹고 꽃 피고 새 지저귀는 소리 무주공산을 밝히지 않겠는가 온새미로 환하게 세상 끝까지.

만시지탄

만시지탄 - 치매행致梅行 · 333 왜 그때는 안 보였을까 아니 왜 내가 못 보았을까 그때는 왜 안 들렸을까 아니 왜 못 들었던 것인가 이제서야 지난날이 가슴속에 들어오다니 아내에게 아무것도 해 주지 못한 것이 이제 와서 나를 울리다니 내 가슴에 못으로 박히다니 시간은 모든 것을 묻는다 무엇이든 다 묻혀지고 만다 나는 잊는다 나도 잊혀진다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믿어지지 않는 세월이었다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일까 인생 일장춘몽이라는데 바늘구멍은 왜 넓기만 한 것인가!

아내의 지우개

아내의 지우개 - 치매행致梅行 · 322 洪 海 里 아내의 지우개는 성능이 탁월합니다 어느새 세상도 다 지워 버리고 세월도 깨끗하게 씻었습니다 어느 틈에 말도 말끔히 지워 버리고 생각도 이미 다 살라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러고 나서 침묵의 집이 되어 멀뚱하니 누워 노는 애기부처가 되었습니다 이제는 지우는 일도 모두 잊었습니다 그걸 아는 나는 실큼한 생각에 젖어 있다 슬그머니 돌아서고 맙니다 잃어버린 그림자 같은 사랑과 잊어버린 격정의 세월을 지나 하롱하롱 져버린 꽃잎이 되어 아내는 혼자 아파서, 아픈 줄도 모르고 누워 있습니다.

쪽잠

쪽잠 - 치매행致梅行 · 315 洪 海 里 당신이 먼저 가고 나면 세상이 얼마나 막막황량하랴 봄은 왔는데 꽃은 피지 않고 바람만 거세차게 불어 닥치는 쪽잠으로 이어진 그제 어젯밤 내가 나에게 시중드는 일도 버거워 쓸데없는 순을 지르듯 잘라내야 하는 나날들이 아닌가 내가 먼저 떠나야지 금란계金蘭契 친구들도 하나 둘 먼저 떠나가 버리고 지상은 점점 넓어져 가고 머릿속 바람소리 홀로 우느니 이 생각 저 생각에 날이 새는데 쪽잠도 반쪽잠이 되어 날아가고 있네.

울컥

울컥 - 치매행致梅行 · 313 洪 海 里 뭔가 해 줘야 하겠는데 해 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내 홀로 누워 있는 방 바람도 오지 않고 햇빛도 궁핍 별도 보이지 않습니다 고요와 적막 번갈아 와서 잠시 둘러보고 멍하니 바라다보다 죽음보다 더 무거운 슬픔 한 조각 더 얹어 주고 침묵을 가지고 놀다 물러납니다 가슴속 가라앉은 돌멩이 하나 도저히 들어낼 수 없어 말이란 바로 마음이려니 하지만 어두운 시간을 밝힐 말 한마디 나를 비껴가는지 허공중에 빈말 하나 떠돌지 않습니다.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 치매행致梅行 · 311 洪 海 里 제 몸 하나 건사는커녕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사람 자식들에게 힘이 돼 주던 그 사랑 어디 두고 누워만 있는가 이름을 하나하나 잊어버리고 집으로 가는 길도 잃어버리고 나서 한밤중에도 뛰쳐나가려 들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여자 잠깐 한눈파는 사이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밤마다 화장실 문을 수없이 여닫던 벽마다 벽화를 그려 올리던 당신 망상과 불안, 환시와 환청으로 기억을 다 지워 버린 다음 세상 슬픔을 다 눌러 담고 단절된 빈 바다에 홀로 누워 무인도가 되어 버린 아내여 내게 던지던 진한 욕설과 폭력은 포화와 포연으로 엮은 사랑타령이었는가 사는 게 전쟁이라는 말 하나 그르고 틀린 것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