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귀뚜라미

귀뚜라미 - 치매행致梅行 · 287 洪 海 里 입추가 내일 모레 갈 날이 머잖았다고 대낮에도 숨 가쁘게 울어 쌓는 귀뚜라미 목이 하얗게 쉬었다 투명한 소리탑 한 층 더 올릴 심산인지 밤까지 울력이 한창 새벽녘 마당에 나가 보니 몇 마리가 땅 위에 나뒹굴고 있다 진력하다 힘이 다 빠져 마침내 혼이 뜨고 말았다 나도 귀뚜라미 곁에서 울다 보니 한평생이 다 새어 나갔다.

이중국적자

이중국적자 - 치매행致梅行 · 282 洪 海 里 "나 미워?" 하고 물으면 어김없이 "응!" 하고 고갤 끄덕입니다 "응!", "아니!", "싫어!", "왜, 그래!" 이것이 아내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아내는 말이 없는 나라에 살았습니다 두 나라를 왔다갔다 하는 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디인지 땅 위에 발 딛고서도 알 수 없습니다.

침묵의 나라

침묵의 나라 - 치매행致梅行 · 281 洪 海 里 뭐라 하면 알아 듣는 것인지 눈을 끔벅끔벅 깜박이다 감아 버립니다 나를 원망하는 것인지 내가 불쌍하다, 한심하다는 것인지 종일 말 한마디 없는 아내의 나라는 한낮도 한밤중입니다 말의 끝 어디쯤인가 달도 오르지 않고 별도 반짝이지 않는 그곳을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인지 아내는 말 없는 말로 내게 속삭입니다.

깜깜절벽

깜깜절벽 - 치매행致梅行 · 279 洪 海 里 아내여, 그곳에도 시간이 있긴 한 것인가 어딘가로 흘러만 가고 있는가 사랑과 관심에서 질투와 미련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돌고 돌아 침묵과 고독의 하루 하루로 이어지는 길인가 그곳도 꽃 피고 새가 우는 곳인가 아니면 연습과 훈련이 필요 없는 깜깜세상인가 길가에 버린 꿈을 찾으며 어디서 놀고 있는가 마음속 품고 있던 사랑의 집 한 채 어디다 버려두고 누워만 있는가 초야가 아니라도 꽃잠처럼 다디단 꿀잠에 빠져 내게 이리 깜깜절벽인 것인가 어찌 대답이 없는가, 아내여!

환청 또는 이명

환청 또는 이명 - 치매행致梅行 · 274 洪 海 里 병원에 온 지 엿새째 눈을 뜨고 멍하니 바라보는 아내 "나 알아, 나 알아 보겠어?" "응!" 하는 소리 들릴락 말락 환청인지 이명인지 내 귀를 울립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인가 그만도 고마워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작년 가을 귀가 차량에서 내리지 않으려 "왜, 왜, 왜 그래! 00년, 지랄하고 있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습니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시원하니 올가을 아내의 입이 활짝 열려 욕이라도 한껏 내뱉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놈, 네가 내 남편이야!"

마지막 편지

마지막 편지 - 치매행致梅行 · 264 洪 海 里 마음 다 주었기로 할 말 없을까. 천금보다 무거운 물 든 나 뭇 잎 한 장 떨 어 진 다. 꿈이나 눈부실까 내 주변만 맴돌다, 아내는 지쳤는지 다 내려놓고 나서, 마지막 가슴으로 찍는 말 무언의 '할말없음!' * 무엇이 남았을까. 다 덜어주고 남은 말이 궁금할 때마다 나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후로 당신의 말은 ‘말 없는 말’이었다. 눈빛의 언어 또는 몸을 뒤척이는 일은 당신이 나중까지 남겨놓은 말이다. 그러니 내가 가까이 가는 모양은 소리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눈에 눈을 대고 들어가 마음의 언어를 읽는다. 기우는 몸을 붙잡고 몸이 내려놓는 말을 받는다. 눈을 마주치고 낮은 자세로 받아 적는 말이 오늘은 마지막 편지인가 싶다가도 내일 또 쓴다. 그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