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끝나지 않은 전쟁

끝나지 않은 전쟁 - 치매행致梅行 · 311 洪 海 里 제 몸 하나 건사는커녕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는 사람 자식들에게 힘이 돼 주던 그 사랑 어디 두고 누워만 있는가 이름을 하나하나 잊어버리고 집으로 가는 길도 잃어버리고 나서 한밤중에도 뛰쳐나가려 들고 무작정 앞으로만 달려가던 여자 잠깐 한눈파는 사이 순식간에 어딘가로 사라져 버리고 밤마다 화장실 문을 수없이 여닫던 벽마다 벽화를 그려 올리던 당신 망상과 불안, 환시와 환청으로 기억을 다 지워 버린 다음 세상 슬픔을 다 눌러 담고 단절된 빈 바다에 홀로 누워 무인도가 되어 버린 아내여 내게 던지던 진한 욕설과 폭력은 포화와 포연으로 엮은 사랑타령이었는가 사는 게 전쟁이라는 말 하나 그르고 틀린 것 없다.

귀뚜라미

귀뚜라미 - 치매행致梅行 · 287 洪 海 里 입추가 내일 모레 갈 날이 머잖았다고 대낮에도 숨 가쁘게 울어 쌓는 귀뚜라미 목이 하얗게 쉬었다 투명한 소리탑 한 층 더 올릴 심산인지 밤까지 울력이 한창 새벽녘 마당에 나가 보니 몇 마리가 땅 위에 나뒹굴고 있다 진력하다 힘이 다 빠져 마침내 혼이 뜨고 말았다 나도 귀뚜라미 곁에서 울다 보니 한평생이 다 새어 나갔다.

이중국적자

이중국적자 - 치매행致梅行 · 282 洪 海 里 "나 미워?" 하고 물으면 어김없이 "응!" 하고 고갤 끄덕입니다 "응!", "아니!", "싫어!", "왜, 그래!" 이것이 아내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한동안, 아니, 오랫동안 아내는 말이 없는 나라에 살았습니다 두 나라를 왔다갔다 하는 일 아무나 하는 것은 아닙니다 시작이 어디고 끝이 어디인지 땅 위에 발 딛고서도 알 수 없습니다.

침묵의 나라

침묵의 나라 - 치매행致梅行 · 281 洪 海 里 뭐라 하면 알아 듣는 것인지 눈을 끔벅끔벅 깜박이다 감아 버립니다 나를 원망하는 것인지 내가 불쌍하다, 한심하다는 것인지 종일 말 한마디 없는 아내의 나라는 한낮도 한밤중입니다 말의 끝 어디쯤인가 달도 오르지 않고 별도 반짝이지 않는 그곳을 혼자 떠돌고 있는 것인지 아내는 말 없는 말로 내게 속삭입니다.

깜깜절벽

깜깜절벽 - 치매행致梅行 · 279 洪 海 里 아내여, 그곳에도 시간이 있긴 한 것인가 어딘가로 흘러만 가고 있는가 사랑과 관심에서 질투와 미련으로 이어지는 긴 여정을 돌고 돌아 침묵과 고독의 하루 하루로 이어지는 길인가 그곳도 꽃 피고 새가 우는 곳인가 아니면 연습과 훈련이 필요 없는 깜깜세상인가 길가에 버린 꿈을 찾으며 어디서 놀고 있는가 마음속 품고 있던 사랑의 집 한 채 어디다 버려두고 누워만 있는가 초야가 아니라도 꽃잠처럼 다디단 꿀잠에 빠져 내게 이리 깜깜절벽인 것인가 어찌 대답이 없는가, 아내여!

환청 또는 이명

환청 또는 이명 - 치매행致梅行 · 274 洪 海 里 병원에 온 지 엿새째 눈을 뜨고 멍하니 바라보는 아내 "나 알아, 나 알아 보겠어?" "응!" 하는 소리 들릴락 말락 환청인지 이명인지 내 귀를 울립니다 얼마 만에 들어보는 아내의 목소리인가 그만도 고마워 눈가에 이슬이 맺힙니다 작년 가을 귀가 차량에서 내리지 않으려 "왜, 왜, 왜 그래! 00년, 지랄하고 있네!" 그게 마지막이었습니다 올해 들어 입추도 지나고 말복도 지났습니다 하늘은 맑고 바람도 시원하니 올가을 아내의 입이 활짝 열려 욕이라도 한껏 내뱉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쁜 놈, 네가 내 남편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