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독종毒種』2012 92

<시> 그늘과 아래

그늘과 아래 洪 海 里 그늘이 있는 곳은 어디인가 그늘이 그늘그늘 드리워진 곳은 어디인가 그늘은 늘 아래 존재한다 그늘은 미끄러워 잡히지 않는다 그런 걸 알면서도 나는 '그늘 아래'라고 겁없이 쓴다 그늘에 아래가 있는가 그러면 그늘의 위는 어디인가 그래 어쩌자고 나는 그늘 아래로 파고 드는가 그냥 그늘 속으로 기어들지 않는 것인가 그늘은 무두질 잘 해 놓은 투명한 가죽이다 그늘에서 가죽에 막걸리를 먹여야 좋은 소리가 난다 그늘의 소리가 배어 있다 나온다 그늘북은 항상 얻어맞는 잔잔한 슬픔이다 그게 아니다 북은 젖어 있는 팽팽한 희망이다 그래 나는 늘 그늘이고, 아래에 있고 싶다. - 《시향》제47호(2012. 가을) - 시집『독종』(2012, 북인)

<시> 벼꽃 이는 것을 보며

벼꽃 이는 것을 보며 洪 海 里  내 몸속에는 몇 만 평의 무논이 펼쳐져 있는 것일까몇 천만 포기의 벼가 소리 소문도 없이 짝짓기를 즐겼을까하늘은 저 무량한 세상을 내려다보며 얼마나 흐뭇했으랴바람은 또 포기 사이사이를 지나다니며 박수치고 축복했으리라물은 물대로 바닥에서 포기마다 뼈를 세워 주려고 무진무진 애를 썼으리라 하면,이 몸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푸른 하늘과맑은 물과 바람과 흙,뜨거운 햇볕과아버지의 짜디짠 여든여덟 말의 땀과어머니가 아침저녁으로 부뚜막에 떠 놓은 수천수만 대접의 정성이내 몸속에 한도 끝도 없이 흐르고 있으니 이 한 몸이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백중百中 전날 괴산 아성阿成마을에 가서벼꽃 이는 것을 바라보다흘러가는 흰 구름을 하염없이 핥고 있었네. - 시집『독종』(2012, 북인)

<시> 시時를 쓰다

시時를 쓰다 洪 海 里  "매일 새벽 3시, 나는 어김없이 눈을 뜬다時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時를 쓰며 살아온 40년…….//신작『비밀』로 돌아온 그에게이 시대의 時를 묻다." 그렇다, 40년간 時를 쓰다언뜻 눈을 뜨니남은 것은 詩뿐이었다절[寺]에 들어가 경도 외지 않고날[日]만 쓰니 말씀[言]이 남았다시인은 詩에 時를 써야 하는가왜 나에게 時를 묻는가텅 빈 내 가슴속 언저리에귀먹은 거문고 하나 세워놓고현간絃間을 읽다 보니행간行間에 거문고 소리가 놀고 있다흰 소리와 검은 소리 아래우선 밑줄 하나 긋는다천신千辛과 만고萬苦의 세상에서어쩌자고 이 시대 時를 묻는 것인가분명 詩를 묻는 것은 아니다묻힌 것이 時든 詩든 모두 시든 것뿐이어서내가 묻는 것에 대한 답을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