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독종毒種』2012 91

<시> 유서

유서 洪 海 里 싸락눈 싸락싸락 싸르락싸락 눈 내려 지상에 백지를 깔아주자 수천수만 마리의 황태가 눈도 내려깔지 않고 몸뚱어리 흔들어 유서를 쓰고 있다. 바닷속에서 그리도 유연하게 흐르던 초서 지상에서는 왜 이리 뻣뻣하게 힘이 드는지 꼬리지느러미의 글씨마다 뼈가 솟는다. 상덕 하덕에 코를 꿰인 채 눈발은 딱 벌린 아가리로 무작정 들어가고 마침내 온몸의 검은 피 다 쏟아낸다. 바람에 흔들리는 대로 마지막 한 자 한 자 휙휙 적다 눈이 오지 않는 한밤이면 황태는 싸늘하게 죽은 작은 별들을 몸으로 맞아들여 따뜻하게 품어 준다. 저 숱한 별들이 황태의 몸속에서 간절하고도 도저한 힘이 되어 칼바람에 흔들리며 쓰는 일필휘지, 조상들의 유서가 깊은 이 골짜기에서 온몸에 문신으로 새기고 있다 얼어붙은 유서를. - 시집..

<시> 눈 내린 날

눈 내린 날 洪 海 里 등이 시려 등 하나 내겁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밝혀주는 아주 작은 것, 기댈 어깨 비벼 댈 언덕 있어 행복합니다. 우두커니 서 있던 시린 마음 하나 덜어내고 찬 손으로 막걸리 한 대접 대접하고 싶습니다. 흰눈이 소복소복 쌓인 들녘 가만히 바라다보면, 그냥 가득해집니다. - 시집『독종』(2012, 북인) * https://cafe.daum.net/jinkyeong100에서 서 옮김.

<시>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洪 海 里  휴대전화를 냉장고 안에 넣어 놓고 줄곧 찾는다는 여자 버스 타고 나서 놓고 온 지갑을 찾는 사내이야기를 듣긴 했지만,무릎 뒷쪽은 오금 또는 뒷무릎팔꿈치 안쪽은 팔오금이라 하는데어깨 안쪽 털이 난 곳을 뭐라 하지'겨드랑이'가 어딜 가 숨어 있는지사흘 낮 사흘 밤을 쥐어짰는데다음 날 또 잊어버렸다조금 전 그 사람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고손에 든 물건의 명칭도 떠오르지 않는다어제 함께 술 마신 친구도 누군지 모르겠다방금 들은 것도 금방 잊어버리고한 말 할 말도 기억나지 않는다시끄러운 세상이 싫어서일까조용히 살고 싶어서일까한적한 시골에 배꼽마당이라도 마련하고마음껏 거닐며 놀아나 볼까, 그런데그곳이 어디인지 생각나지 않는다오래된 나의 오늘이 깜깜하기 그지없다. - 시집『독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