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치매약을 복용하다

치매약을 복용하다 - 치매행致梅行 · 186 洪 海 里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아내는 아침저녁으로 약을 복용합니다 아침에 다섯 알 잠자기 전에 여섯 알 제법 양이 많습니다 엊저녁 물 한 잔에 약 세 알을 먼저 주었습니다 한꺼번에 다 삼키기가 벅차 두 번에 나눠 줍니다 그런데, 그런데 아내에게 세 알을 주고 나머지 세 알은 내가 그만 꿀꺽해 버렸습니다 순간적이었습니다 아차! 실수는 늘 때늦은 후회를 불러옵니다 다른 약봉지를 자세히 살펴보니 세 알은 원형대로 동그란 알약이고 세 알은 반씩 쪼갠 것이었습니다 부부는 살다 보면 서로 닮아가기도 하고 일심동체란 말도 있어 그런가 봅니다 이제 나도 치매환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약을 먹어도 아내가 나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게 나야?

이게 나야? - 치매행致梅行 · 179 洪 海 里 '나'를 찾아가는 세상에서 길을 잃은 사람 천지 사방, 허방을 허정허정 가고 있습니다. 어제는 나를 가리키며 "이게 나야?" 묻더니 오늘은 벽을 보고 같은 질문을 합니다 아내는 어느 나라에 있는 걸까요 어느 길을 가고 있는 것일까요 어디서 나를 찾고 있는지 어디로 나를 찾아 가고 있는지 '나'란 것이 있기는 한 것인가 길은 보이지 않는데 나를 찾아 가는 눈물겨운 발길 발자국 소리도 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나는 어디 있는가 나는 무엇인가 아내가 가고 있는 길을 따라 하염없이 뒤에서 허정대고 있습니다.

투명감옥

투명감옥 - 치매행致梅行 · 172 洪 海 里 어쩌자고 아내는 저 속으로 들어갔을까 이러저러지도 못하는 나는 밖에서 떠돌고 있다 아니, 아내는 밖에서 자유롭게 놀고 있고 갇힌 나는 칠흑의 절벽만 바라보고 있다 내가 나가지도 아내가 들어오지도 못하는 투명한 유리감옥! 답답한 구경꾼과 안타까운 수인囚人 마주보고 있어도 천리 밖 먼먼 너의 목소리 귀를 나발喇叭처럼 열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 들리지 않는다.

일요일 오후

일요일 오후 - 치매행致梅行 · 171 洪 海 里 이제까지 한평생 75년 46년을 함께 산 한 생生인데 아내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남편이란 사내 일요일 하루 종일 두 사람이 부딪치는 일상 한평생 한 말이 한 말이 아니라 몇 말이 되는지도 모르는데 무슨 할 말이 많이 남아 있겠는가 오전을 무사히 보냈으니 마음이 놓인 탓인가 오후 세 시 반 촐촐한 참에 막걸리 한 병을 꺼내다 홀짝이고 있는 사이 밖으로 나가는 사람 내가 얼마나 더 늙고 낡아야 그 사람 속을 알 수 있을까 지금 알고 있다 해도 남은 시간이 별로 없는데 말라가는 웅덩이에서 힘없이 퍼덕이며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피라미 한 마리 혼자 견디다 가자며 막걸릿잔을 들이켭니다.

그러려니

그러려니 - 치매행致梅行 · 178 洪 海 里 언젠가 내가 당신 곁에 없는 날이 오겠지요 아니면 당신이 내 옆에 없는 때가 오겠지요 해는 아침을 위해 붉게 지고 꽃은 다시 피려고 시드는데 길도 없고 불빛도 보이지 않는 세상 당신을 버리고 나도 버리고 모든 걸 다 놓아 버리면 끝인 것인가 속울음으로 지우고 지우며 가는 당신 모습 정을 뗀다는 것이 무엇인가 이게 나를 위하는 길이라고 식전댓바람부터 난리를 치는 것인가 눈물이 노래하고 울음이 노래하고 슬픔이 노래하는 이승의 또 다른 하루!

이별 연습

이별 연습 - 치매행致梅行 · 167 洪 海 里 "어디 가?" "학교 가야지!" 아침마다 차가 오면 함께 가자고 팔장을 낍니다 "나도 가야지!" 하며 기분 좋게 대문을 나섭니다 공부 잘하고 오라며 차에 태우려 들면 왜 나만 가느냐고 안 가겠다고 난리가 일어납니다 간신히, 간신히 태우고 돌아서려면 원망하듯 물끄러미 바라다보는 아내의 눈길이 너무 애련해 재빨리 돌아서고 맙니다 날마다 반복되는 이별 연습입니다 내가 하는 한마디가 마지막 말이 되지 않도록 말하지 말고 아껴둬야지 하면서도 오늘 아침에도 이별의 말 한마디 어쩔 수 없이 던지고 맙니다.

낙타행

낙타행 - 치매행致梅行 · 152 洪 海 里 아내의 나라는 말이 웃음으로 꽃피는 곳, 그냥 바라다보면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하듯 웃음이 모든 말이 되는 천국이지만, 아내는 여기가 어딘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길로 발밤발밤 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힘겨운 싸움인지도 모르고 싸움이 싸움인지도 모르고 아내는 내 가슴에 화살을 쏘아댑니다. 오늘도 남편이란 이름이 쓸쓸해 나이 든 낙타는 막막한 사막을 생각합니다.

늙은 밥

늙은 밥 - 치매행致梅行 · 159 洪 海 里 아내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다 보니 밥이 아주 많이 늙었습니다 피부도 거칠고 주름 지고 저승꽃도 보입니다 꽃이 피는 밥을 아침으로 먹습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입니다 아침은 가장 신선한 시간인데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는 늙은 밥입니다 늙은 밥이 늙어서 불쌍하다고 숟가락 젓가락이 가락가락加樂加樂 놉니다 숟가락이 일할 때 젓가락이 놀고 젓가락이 일할 때 숟가락이 노래합니다 아침 먹은 힘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밥 그릇 국 대접 반찬 접시 숟가락 젓가락 찻잔까지 씻고 부시고 깨뜨리면서 끝장이 납니다 아내는 노랜지 울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웃음꽃을 피우지만 꽃잎은 내 가슴에 떨어져 나를 울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