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늙은 밥

늙은 밥 - 치매행致梅行 · 159 洪 海 里 아내와 마주앉아 아침을 먹다 보니 밥이 아주 많이 늙었습니다 피부도 거칠고 주름 지고 저승꽃도 보입니다 꽃이 피는 밥을 아침으로 먹습니다 저녁이 아니라 아침입니다 아침은 가장 신선한 시간인데 태어난 지 며칠이나 되는 늙은 밥입니다 늙은 밥이 늙어서 불쌍하다고 숟가락 젓가락이 가락가락加樂加樂 놉니다 숟가락이 일할 때 젓가락이 놀고 젓가락이 일할 때 숟가락이 노래합니다 아침 먹은 힘으로 설거지를 합니다 밥 그릇 국 대접 반찬 접시 숟가락 젓가락 찻잔까지 씻고 부시고 깨뜨리면서 끝장이 납니다 아내는 노랜지 울음인지도 모르고 그냥 웃음꽃을 피우지만 꽃잎은 내 가슴에 떨어져 나를 울립니다.

짓는다는 것

짓는다는 것 - 치매행致梅行 · 158 洪 海 里 반달 하나 하늘가에 심어 놓고 눈을 감은 채 바라다봅니다 먼 영원을 돌아 달이 다 익어 굴러갈 때가 되면 옷 짓고 밥 짓고 집 지어 네 마음 두루두루 가득하거라 내 눈물 지어 네 연못에 가득 차면 물길을 내 흘러가게 하리라 사랑이란 눈물로 씻은 바람과 햇빛 같은 것 아니겠느냐 아내여, 네 웃음에 나도 따라 짓지만 어찌하여 그것이 이리도 차고 아픈가.

어른애

어른애 - 치매행致梅行 · 157 洪 海 里 아내는 다시 한 살이 되고 나서 다시 한살이를 시작하는 어른애가 되었습니다 어린이가 어른이가 되었습니다 아침마다 가방을 메고 어른이유치원엘 갑니다 밤이면 품속으로 파고들어 팔베개를 하고 잠이 듭니다 우리 부부는 자귀나무 이파리처럼 낮에는 떨어졌다 밤이면 포개지는 일심동체 나도 아내 따라 어른애가 됩니다.

촐촐하다

촐촐하다 - 치매행致梅行 · 115 洪 海 里 깊은 겨울밤 잠 오지 않아 뒤척이는데 부엌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 누가 술상이라도 보는가 생각은 벌써 술잔에서 촐촐 넘치고 창밖엔 눈이 내리고 있는지 곁엔 잠에 빠진 아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 감상 : 홍해리 시인은 치매에 이른 아내를 옆에서 돌보면서, 일종의 간병기(看病記)와 같은 421편의 시를 네 권의 시집으로 묶어서 출간한 바 있다. 홍해리 시인에게 시 쓰는 일은 평생을 밥 먹듯이 숨 쉬듯이 해온 일이기도 했지만, 치매행 관련 시집은 치매 가족이나 비슷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위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한 땀 한 땀 깁는 마음으로 써내려간 육필 시다. 『마음이 지워지다』는 기존의 네 권 시집에서 출판사 놀북이 가려 뽑은 119편..

겨울 들녘

겨울 들녘 -치매행致梅行 · 143 洪 海 里 가득 품고 있던 것들 다 내주고 텅 빈 채 누워 있는 저 들판을 보면, 한평생 끌어모아 애지중지하던 것들 얼마나 하찮은 허섭스레기인가. 비웠다고 가난해 보이겠는가 좀 부족하면 또 어떤가 성자의 얼굴 같은 저 들녘을 보라. 철새 떼 내려와 눈발에 발을 씻고 발자국들이 들을 녹이고 있어 머잖아 봄이 오는 소리 보는 듯 들리겠다. * 지금 아내는 모든 것을 다 내준 들녘 같습니다. 집사람에게도 봄이 오는 소리가 들렸으면 정말 좋겠습니다.

바위보다 깊은 잠

바위보다 깊은 잠 - 치매행致梅行 · 138 洪 海 里 나의 잠은 늘 얇고 얕아서 개울을 건너가는 징검다리 하나 둘 세다 깨고 다시 잠들다 또 깨고 누에는 몇 잠만 자면 곱고 질긴 실을 내는데 나는 수천수만의 잠을 자도 날개 하나 돋지 않는다 오늘 밤은 푹 자다 꿈도 꾸지 말고 죽고 싶다고 꽃 속에 집 한 채, 물 위에 집 한 채 저 달에도 또 한 채, 내일 아침에도 깨지 말자고 젖어 있는 바위보다 깊은 잠을 위하여 물속으로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슬그머니

슬그머니 - 치매행致梅行 · 133 洪 海 里 슬그머니 내 품으로 기어든 아내 팔베개를 하고 있다 잠시 후 썰물처럼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나이 든 아내의 야윈 몸도 잠시 안고 있으면 따뜻해집니다 아내의 온기로 스르르 잠이 듭니다 젊음이 다 빠져나간 두 개의 몸뚱어리 꿈속에서도 물 위에 떠 있는 부란浮卵처럼 늘 불안, 불안합니다 어딘지도 모르는 막막한 곳으로 부랴부랴 달려가다 잠을 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