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백야

백야 - 치매행致梅行 · 125 洪 海 里 머리에서 가슴으로 가는 길 너무 멉니다 마음에서 몸으로 가는 길도 너무 힘듭니다 걱정에 젖어 잠이 오지 않고 근심으로 꿈이 산산 달아납니다 잠을 자는 건지 꿈을 꾸는 건지 당신이 내게 무엇이었는가 나는 당신에게 누구였는가 생각하면 눈물부터 핑, 도는 바라보면 울컥해서 가슴만 아픈 오늘 밤도 달이 뜨지 않는데 뿌연 하늘 아래 눈먼 이를 이끌고 가는 장님 사내 하나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여보, 사랑해! - 치매행致梅行 · 129 洪 海 里 아내는 어쩌다 나일 꺼꾸로 먹어 정신줄을 놓아버렸습니다 대신 잡아 줄 수도 없어 답답한 마음 얼마큼 가야 길이 보일지 하루라도 제정신으로 돌아온다면 하고 싶은 말 한마디 있습니다 '여보, 사랑해!' 바로 이 말 나는 그조차 인색한 사내였습니다 젊어서 받지 못한 사랑 이제 받고 싶어 아내는 조르는 것인가 쓰잘머리 없는 이런저런 생각으로 오늘도 내 마음은 열대야입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땀만 줄줄 흘립니다 이러다 잠을 깨면 하루가 천년입니다 삼시 세 끼는 왜 그리 빨리 돌아오는지 아침 점심 저녁 준비로 분주한 날마다 외상말코지도 아닌데 마음만 팍팍합니다. * 외상말코지 : 어떤 일을 시키거나 물건을 주문할 때 돈을 먼저 치르지 않으면 선뜻 해 주지 않는 일

고집불통

고집불통- 치매행致梅行 · 121 洪 海 里   남편이나 자식뿐만 아니라 자신까지도 송두리째 잊어버리는 사람지켜볼 수밖에 없는 내가, 너무속이 상해서속이 다 타서뭉그러진 마음으로 생각, 생각에 젖다여보! 하고 부를 수 있고함께 있는 것만도 복이지 싶어안타까운 마음을 접으려 애를 써봅니다하필이면, 하필이면 왜, 하는 원망도 덮고우리의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아도그냥 바라다보려 합니다피할 수 없는 절망의 구렁텅이에서촛불을 밝혀도등불을 내걸어도세상은 칠흑의 황야입니다한여름인데 겨울옷을 입고 나서는 아내막무가내 옷을 갈아입으려 들지 않습니다끝내,내가 지고 만 채 유치원 차에 태웁니다아내의 세상은 한여름에도 추운가 봅니다.  * 제가 나가고 있는 서울 중구문화원 시 창작반에서 한 수강생으로부터시집 한 권을 받았습니..

반짝

반짝 - 치매행致梅行 · 119 洪 海 里 이게, 나야? 이게, 나야? 가족 사진 액자 속 자기를 가리키며 아내는 묻습니다 화장대 위 독사진을 들고 와 또 묻습니다 그래, 맞아! 당신이야! 그런데 그 여자 이름이 뭐지? 한참을 생각하고 나서 아들 이름을 댑니다 그건 아들이고 당신 이름 말야 또 한참 지나 이름을 제대로 말합니다 제 가슴 한쪽에 반짝 불이 켜집니다 아내도 아늠 곱게 웃음을 피우고 웃겨! 웃겨! 하며 사진을 바라봅니다 어린아이가 제 사진을 처음 바라보듯 생판 모르는 사람인 듯 쳐다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내를 두고 내가 이러면 안 되는데 하면서도 자꾸만 가슴이 한쪽으로 무너집니다 남편이란 이름이 정말 쓸쓸합니다. 이게, 나야? 그래, 맞아! 이게 나야? 당신, 맞아!

화두話頭

화두話頭 - 치매행致梅行 · 111 洪 海 里 어디로 가나 어디로 가나 하루 종일 붙잡고 매달렸지만 머릿속은 뿌옇기만 합니다 갈 곳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갈 길이 보이지 않습니다 하루가 저물고 밤이 옵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길을 찾아봅니다 별 하나하나에 등불을 걸어 놉니다 반짝이던 별이 금세 사라지고 하늘이 먹장구름으로 덮이고 맙니다 번개 치고 천둥 울고 비가 쏟아집니다 여기저기서 벼락을 때립니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갈까.

막막봄날

막막봄날 - 치매행致梅行 · 106 洪 海 里 비는 몸을 재끼면서 하늘거리는 몸짓으로, 아프게 팔랑팔랑 내리고 세상을 화안하게 밝혀서 푸석한 가슴속 오랫동안 잊고 살던 그리움 하나 깨어나고 있다 이 비 내리며, 멎으며, 겨우내 그리워하던 목숨들 물오른 목청 틔워 짝 찾아 나서고 모두들 숨이 가빠 색색대는데 수줍은 애잎들 달거리하듯 연둣빛 숨을 토해낼 때 하늘로 하늘로 오르는 아지랑이 취한 듯 어지러워 죽을 듯 어지러워 아내는 유치원 가고 홀로 남아 집 지키는 막막한 봄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