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봄, 벼락치다』2006 106

연가

연가 洪 海 里 맷방석 앞에 하고 너와 나 마주 앉아 숨을 맞추어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어찌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 잡은 자리 저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어떠하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한 生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 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수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은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짜디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

고추꽃을 보며

고추꽃을 보며 洪 海 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