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개운開雲 개운開雲 洪 海 里 매화가 피었어도 눈으로도 귀로도 향기를 맡을 수 없더니 병원에서 돌아오자 꽃은 이미 다 지고 꽃이 있던 자리 쥐눈이콩만한 열매 가녀린 탯줄에 매달린 아기처럼 조롱조롱 맺혀 있다 초록빛 앙증맞은 눈빛을 찾아 내가 건너뛴 시간의 간극間隙. 개운하다, 풋사랑!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찰나 찰나 洪 海 里 도화桃花 그늘에 앉아 술 한잔 하고 나니, 녹수청산綠水靑山 어디 가고 홍엽紅葉이 만산滿山, 찬서리 내리고 백설만 펄펄 분분紛紛하네.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강가에 서다 강가에 서다 洪 海 里 왜 강가에 서서 흘러가는 물을 바라다보는가 텅 빈 가슴으로 어처구니 빠진 맷돌처럼 우두커니 서서, 망연자실, 물결만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것은 다 잃고 나면 다 잊고 나면 다 버리고 나면 상선약수上善若水라고 착해지고 싶어서일까 새벽마다 정화수井華水 길어다 놓고 정성 ..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그리운 지옥 · 봄 그리운 지옥 · 봄 洪 海 里 "서방님!" 하는 아주 고전적인 호칭으로 산문에 들어서는 발목을 잡아 세워서 삼각산 바람소린가 했더니 사방을 둘러봐도 아무도 없고 꽃 속의 부처님만 빙긋이 웃고 있네.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새는 뒤로 날지 않는다 새는 뒤로 날지 않는다 洪 海 里 새가 나는 것은 공간만이 아니다. 새는 시간 속을 앞으로 날아간다. 때로는 오르내리기도 하면서~~~. 날개는 뒤로 가는 길을 알지 못한다. 신은 새에게, 뒤로 나는 법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 - 시집『비밀』(2010, 우리글)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길에 대하여 길에 대하여 洪 海 里 한평생을 길에서 살았다 발바닥에 길이 들었다 가는 길은 공간이고 시간이었다 공간에서 제자리를 가고 시간에선 뒷걸음질만 치고 있었다 샛길로 오솔길로 가다 큰길로 한번 나가 보면 이내 뒷길로 골목길로 몰릴 뿐 삶이란 물길이고 불길이었다 허방 천지 끝없는 ..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새 새 洪 海 里 아내는 머릿속에 새를 기르고 있다 늘 머리가 아프다 한다 부리로 콕콕 쪼아대는지 귀에서 새소리가 난다고 한다 구름이 끼어 있는 사시사철 새는 푸른 하늘이 그립다 한다 새는 너른 들판이 그립다 운다 갇혀 있는 새는 숨이 막혀 벽을 쪼아댄다 날아가고 싶어 아내는 새벽부터 새가 되어..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한 쌍의 봄 한 쌍의 봄 洪 海 里 국립4·19민주묘지 환한 매화꽃 아래 비둘기 한 쌍 포록, 올라타더니 아슬아슬 이층을 쌓는다 잠깐,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찰나의 열락) 파르르 꽁지를 맞추고 나서 금방 내려와 한참을, 꼼짝 않고 마주보고 있다 다시 한참을 부리로 깃을 고르고 나서도 또 한참을 그 ..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 독작하는 봄 독작하는 봄 洪 海 里 앵앵대는 벚나무 꽃그늘에서 홀로 앉아 술잔을 채우다 보니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 절로 날리고 마음은 자글자글 끓어 쌓는데 가슴속 눌어붙은 천년 그리움 절벽을 뛰어내리기 몇 차례였나 눈먼 그물을 마구 던져대는 봄바람 사랑이 무어라고 바르르 떨까 누가 화궁花宮으로 초대라도 했는가 시린 허공 눈썹길에 발길 멈추면 사는 일 벅차다고 자지러드는 날 햇빛은 초례청의 신부만 같아 얼굴 붉히고 눈길 살풋 던지는데 적멸보궁 어디냐고 묻지 말아라 네 앞에 피어나는 화엄/花嚴을 보라 마저 피지 못한 꽃도 한세상이라고 꽃은 절정에서 스스로 몸을 벗는다 왜 이리 세상이 사약처럼 캄캄해지나 무심한 바람결에 꽃잎만 절로 날리니 달뜨는 마음 하나 마음대로 잡지 못하네. - 시집『비밀』(2010, 우리글) 시집『비밀』2010 2010.02.07
<시>한 끼 식사 한 끼 식사 洪 海 里 겨우내 이 나무 저 나무로 동가식서가숙하던 직박구리 한 쌍 매화꽃 피었다고 냉큼 찾아왔다 여름도 한겨울이던 50년대 물로 배를 채우던 시절 꿀꿀이죽은 꿀꿀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맛이야 꿀맛이 아니었던가 가지마다 사푼사푼 옮겨 앉아 꽃치마 속에 뾰족한 부리를 박고 쪽.. 시집『비밀』2010 2010.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