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화 및 영상詩 1282

고추꽃을 보며

고추꽃을 보며 洪 海 里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도 않는 저 작고 보잘것없는 흰 꽃 쥐 죽은 듯 조용하다 어찌 저것이 밀애를 했나 푸른 고추를 달고 소리 소문도 없이 속에 하얀 씨앗을 가득 담는지 햇빛 쨍한 날 어느새 검붉게 피를 토하며 시뻘건 독을 모아 씨앗들을 노랗게 영글리는지 짤랑짤랑 방울 소리를 내는지 참, 모를 일일세 허구한 날 하고많은 꽃 다 제쳐두고 오늘 내 네 앞에서 전전긍긍하는 것은 내 버린 영혼을 네 매운 몸으로 비벼대고 싶어서일까 몰라 오랫동안 햇빛에 취한 너를 보며 내 홀로 골몰하는 것은 너의 우화등선 아니 수중 침전을 위해서인가 드디어 네가 죽어 눈앞이 환하다 세상이 시원하다 어, 시원해, 잘 익어 곰삭은 고추장 만세!

유채꽃

정말 그랬다. 봄 그리고 가을, 두 계절이 앞 계절과 바뀌고 슬슬 깊어갈 때면 현무암이 뭐야, 대포알이 지나간 것처럼, 정말 숭숭숭...구멍이 뚫린 것 같았다. 가슴 구멍으로 바람 드나드는 소리가 들리고 건드리는 이 없어도 혼자 막 아프고 그랬다. 늦은 사춘기였을까 이른 갱년기였을까, 애매한 나이에 들리던 가슴을 지나던 바람소리가 이제는 멈췄다. 나이 드는게 나쁜 것만은 아닌 것이다. 이제는 빨리 늙어도 그닥 아쉽지 않다. [출처] [유채꽃 / 홍해리] 내가 쓰는 글마다 하나같이 노란 연서같다 .|작성자 글부자

아내새 / 글씨 : 가원

아내새 洪 海 里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부친다 기력이 쇠잔한 새는 조롱조롱 새장 안을 서성일 따름 붉게 지는 노을을 울고 있다 담방담방 물 위를 뛰어가는 돌처럼 온몸으로 물수제비뜨듯 신선한 아침을 노래하던 새는 겨울밤 깊은 잠을 비단실로 깁고 있다 노래도 재우고 울음도 잠재울 서서한 눈발이 한 생生을 휘갑치고 있다. - 시집 『독종』(2012, 북인).

洪海里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 발간 김창집 2021. 7. 19. 16:34 ♧ 아내 쓸쓸한 허공 나지막이 비상하던 날개 여린 새 한 마리 다 늦은 가을 저녁 어스름 내 가슴에 와 깃을 치고 있느니 젖은 자리 또 적시며 울고 있느니. ♧ 입춘 추위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봅니다 어디 가고 싶냐 물어도 묵묵부답 조금 있다 또 문을 엽니다 밖에 나가고 싶냐 물어도 그냥 웃습니다 또 문을 열고 치어다봅니다 누굴 기다리느냐 물어 봐도 아무 말이 없습니다 또 다시 문을 열고 쳐다봅니다 속이 답답하냐 물어도 하늘만 바라보다 문을 닫습니다 입춘날 날씨 매섭게 찬데 어찌 봄이 오겠습니까? 문을 열면 칼바람만 제 세상인 듯 쩡쩡하니 밀려듭니다. ♧ 다저녁때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