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시時를 쓰다

시時를 쓰다 洪 海 里   "매일 새벽 3시, 나는 어김없이 눈을 뜬다時를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時를 쓰며 살아온 40년…….//신작『비밀』로 돌아온 그에게 이 시대의 時를 묻다." 그렇다, 40년간 時를 쓰다언뜻 눈을 뜨니남은 것은 詩뿐이었다절[寺]에 들어가 경도 외지 않고날[日]만 쓰니 말씀[言]이 남았다시인은 詩에 時를 써야 하는가왜 나에게 時를 묻는가텅 빈 내 가슴속 언저리에귀먹은 거문고 하나 세워놓고현간絃間을 읽다 보니행간行間에 거문고 소리가 놀고 있다흰 소리와 검은 소리 아래우선 밑줄 하나 긋는다천신千辛과 만고萬苦의 세상에서어쩌자고 이 시대 時를 묻는 것인가분명 詩를 묻는 것은 아니다묻힌 것이 時든 詩든 모두 시든 것뿐이어서내가 묻는 것에 대한 답을 ..

우화羽化

우화羽化 洪 海 里  바닥을 본 사람은 그곳이 하늘임을 안다위를 올려다보고 일어서기 위해 발을 딛는 사람은하늘이 눈물겨운 벽이라는 것을 마지막 날아오를 허공임을 알고내던져진 자리에서젖은 몸으로바닥을 바닥바닥 긁다 보면드디어, 바닥은 날개가 되어 하늘을 친다바닥이 곧 하늘이 된다. - 시집『독종』(2012, 북인)- 서울일보/ 2011. 12. 8. (목) 詩가 있는 풍경>    * 며칠 아무것도 되지 않는 날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말하자면 시도 무엇도 만나지 못한 채 빈속을 채울 무언가를 찾다가 엎드린 거기, 바닥이 맞다. 몸이 바닥에 닿았으니, 바닥을 보았으니 이제는 일어서기 위해 손을 짚어야 하는데 어쩌다가 나는 엎드린 자리에 내려온 시를 읽는다. 시집을 펼쳤다가, 바닥이 되어본 사람의 편지를 받는다..

하동여정河東餘情

하동여정河東餘情 洪 海 里 보리누름 지나고 모내기 마치면섬진강 끌고 노는 버들전어 떼물위로 반짝, 반짝, 몸을 던지지색시비 내리는 날 배를 띄우고무람없는 악동들 물치마 열면사내들의 몸에선 밤꽃이 솟네. - 시집『독종』(2012, 북인)    * 짧고도 명명창창한 이 서경을 무엇으로 표현할까. 리뷰를 하고 싶은데 극심한 언어부족을절감한다. 배를 끄는 것은 사람일진대 버들전어가 섬진강을 끌고 놀다니. 번쩍번쩍 몸을 던져 은빛춤을 추는데 색시비는 또 내리고 …….시집『독종 』에는 말 그대로 '독종'의 시편들이많다. 어디서 맞닥뜨리지 못한 깊고 깊은 시편80여 수가 모두 이렇다. 시인의 타 시집들도 그랬듯 지독히도 끈끈한 사랑, 슬픔도 기쁨도 죄다 따뜻하게 구현되어 긴 여운을 주고 있다.한 줄 한 줄 읽어 내려..

만공滿空

만공滿空 洪 海 里 눈을 버리면서 나는 세상을 보지 않기로 했다. 귀도 주면서 아무것도 듣지 않기로 했다. 마음을 내 마음대로 다 버리니 텅 빈 내 마음이 가득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내 것이라고, 바보처럼 바보처럼 안고 살았다. - 시집『독종毒種』(2012, 북인) ♣ 만공滿空을 읽고 나서... / 道隱 정진희(시인) 만월滿月 마음을 버리면 가득하게 차는 것을, 더 바라지 않으면 행복하다는 것을, 늙어서야 알게 되었다. 아내에게도 자식에게도 친구에게도 돈과 건강도 더 바라지 않고 살기로 했다. 둥근달이 휘영청 떠올랐다 ========================================== 만공滿空 洪 海 里 실오라기 한 가닥 걸치쟎아도 부끄럽지 않아라 당당한 알몸 다갈색 바람 짙은 침묵 묵화를 ..

수련睡蓮 그늘

* 운악산 봉선사에서 나영애 시인 촬영. 2012. 6. 9.  수련睡蓮 그늘 洪 海 里  수련이 물위에 드리우는 그늘이천 길 물속 섬려한 하늘이라면칠흑의 아픔까지 금세 환해지겠네그늘이란 너를 기다리며 깊어지는내 마음의 거문고 소리 아니겠느냐그 속에 들어와 수련꽃 무릎베개 하고푸르게 한잠 자고 싶지 않느냐남실남실 잔물결에 나울거리는천마天馬의 발자국들수련잎에 눈물 하나 고여 있거든그리움의 사리라 어림치거라물속 암자에서 피워올리는푸른 독경의 소리 없는 해인海印을무릎 꿇고 엎드려 귀 기울인다 한들저 하얀 꽃의 속내를 짐작이나 하겠느냐시름시름 속울음 시리게 삭아물에 잠긴 하늘이 마냥 깊구나물잠자리 한 마리 물탑 쌓고 날아오르거든네 마음 이랑이랑 빗장 지르고천마 한 마리 가슴속에 품어 두어라수련이 드리운 그늘이 ..

소금과 시詩

소금과 시詩 洪 海 里 소금밭에 끌려온 바다가 햇볕과 바람으로 제 몸을 다 버리고 나서야 잘 여문 소금이 영롱하게 피어난다 맛의 시종인, 아니 황제인 소금의 몸에서 밀물과 썰물이 놀고 있는 소리 들린다. 소금을 기르는 염부의 등을 타고 흘러내린 수천수만 땀방울의 울력으로 바다의 꽃, 물의 사리인 가장 맛있는 바다의 보석이 탄생하듯이, 시인은 말의 바다를 가슴에 품고 소금을 빚는 염부, 몇 달 몇 년이 무슨 대수냐면서 한 편의 시는 서서히 소금으로 익어간다. 어둔 창고 속에서 간수가 빠져나가야 달고도 짠 소금이 만들어지듯 서둘지 마라, 느긋하게 뜸을 들이며 가슴속 언어산의 시꽃은 열매를 맺는다. - 시집『독종』(2012, 북인) 소금별 뜨거운 태양 아래 한 인부가 영글어 가는 소금 결정체를 수확하고 있습니..

독종毒種

독종毒種 1 세상에서 제일의 맛은 독이다 물고기 가운데 맛이 가장 좋은 놈은 독이 있는 복어다 2 그러나 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 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 아름답다고 그들이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 귀여운 새싹이 손을 타면 애잎은 손독이 올라 그냥 말라 죽는다 그들이 함부로덤부로 뱉는 말에도 독침이 있다 침 발린 말에 넘어가지 마라 말이 말벌도 되고 독화살이 되기도 한다 3 아름다운 색깔의 버섯은 독버섯이고 단풍이 고운 옻나무에도 독이 있다 곱고 아름다운 것들은 모두 독종이다 그러나 아름답지 못하면서도 독종이 있으니 바로 인간이라는 못된 종자이다. 4 인간은 왜 맛이 없는가? - 시집『독종』(2012, 북인) * 온 누리에 으뜸가는 독종이 바로 사람이란다. 눈빛에도 독이 있어 꽃을 시들게 하고, 손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