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가을 엽서

가을 엽서  洪 海 里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달빛을 맞은 지상의 벌레들도 밤을 도와 은실을 잣고 있습니다 별빛도 올올이 내려 풀잎에 눈을 씻고 이슬 속으로 들어갑니다 더 큰 빛을 만나기 위해 잠시, 고요 속에 몸을 뉩니다 오늘도 묵언 수행 중이오니 답신 주지 마십시오.  - 시집 『푸른 느낌표!』(2006, 우리글)                      *'열린 창가에서 편지 읽는 소녀',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엽서 洪 海 里시월 내내 피어오르는 난향이 천리를 달려..

산수유 그 여자

* 내외신문 2017 . 04. 03. 산수유 그 여자  洪 海 里   눈부신 금빛으로 피어나는누이야,네가 그리워 봄은 왔다 저 하늘로부터이 땅에까지푸르름이 짙어 어질머리 나고 대지가 시들시들 시들마를 때너의 사랑은 빨갛게 익어조롱조롱 매달렸나니 흰눈이 온통 여백으로 빛나는한겨울, 너는늙으신 어머니의 마른 젖꼭지 아아,머지않아 봄은 또 오고 있것다. * 홍해리 시인은 충북 청주 출생으로 고려대 영문과를 졸업하였다.시집『투망도』(1969)로 등단하였으며 사단법인 우리詩진흥회 이사장으로 '우이시낭송회'를 30여 년째 이끌고 있다. 2015년에 19집 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를 출간하였다.2017. 04. 03.  * 전남 구례군 산동면 '산수유 사랑공원'의 홍해리洪海里 시목「산수유 그 여자」   *..

달항아리

달항아리  洪 海 里  백자대호나 원호라는 명칭은 너무 거창하다좀 촌스럽고 바보스런 달항아리우리 어머니가 나를 가졌을 때넉넉하고 봉긋한 그 배가 아니겠는가먹을 것 없어 늘 배가 비어 있어도항아리는 배가 불룩해서 그지없이 충만하다달이 떠서 밝아도 보름이고달 없는 칠흑의 밤에도 보름달이다문갑 위에 놓으면 방 안에도 달이 뜨고아버지 가슴에도 달빛이 환하다찬장 위에서 가난을 밝히는 달항아리그것을 바라다보는 마음마다이지러졌다 다시 차오르는 달로 뜬다어린 자식의 응석을 다 받아주고 품어 주는어머니가 항아리를 안고 계신다세상 사는 일 가끔 속아 주면 어떤가 어수룩하다고 바보가 아니다어머니가 항아리 속 아버지 곁에 계신다.  * 白磁大壺와 圓壺는 달항아리의 다른 이름.  - 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

홑동백꽃

홑동백꽃 洪 海  里   내가 한 가장 위대한 일은 너에게 '사랑해!' 라고 말한 것이었다 젖은 유서처럼 낮은 울음으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네 입술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 나를 덮는 한 잎의 꽃 아지랑이 아지랑이. - 시집『독종』(2012, 북인)            *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때는 네 입술이 내게 다가온 순간이었다나를 덮는 한 잎의 꽃,아지랑이 아지랑이." - 「홑동백꽃」 2연.  - 여전히 젊음이 넘쳐흐르신다. 아직 가슴속에 청년의 피가 흐르고 있다.  에로티즘 서정미학이 아직도 전신의 말초혈관 끝까지 흐르고 있으니 백수를 훨씬 넘길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조심하라!가장 무서운 독종은 인간이다.그들의 눈에 들지 마라.아름답다고 그들의 눈독을 들이면 꽃은 시든다.'차..

연가

연가 洪 海 里 맷방석 앞에 하고 너와 나 마주 앉아 숨을 맞추어 맷손 같이 잡고 함께 돌리면 맷돌 가는 소리 어찌 곱지 않으랴 세월을 안고 세상 밖으로 원을 그리며 네 걱정 내 근심 모두 모아다 구멍에 살짝살짝 집어넣고 돌리다 보면 손 잡은 자리 저리 반짝반짝 윤이 나고 고운 향기 끝 간 데 없으리니 곰보처럼 얽었으면 또 어떠랴 어떠하랴 둘이 만나 이렇게 고운 가루 갈아 내는데 끈이 없으면 매지 못하고 길이 아니라고 가지 못할까 가을가을 둘이서 밤 깊는 소리 쌓이는 고운 사랑 세월을 엮어 한 生을 다시 쌓는다 해도 이렇게 마주 앉아 맷돌이나 돌리자 나는 맷수쇠 중심을 잡고 너는 매암쇠 정을 모아다 서름도 아픔까지 곱게 갈아서 껍질은 후후 불어 멀리멀리 날리자 때로는 소금처럼 짜디짠 땀과 눈물도 넣고 소..

금강초롱

금강초롱 洪 海 里   초롱꽃은 해마다 곱게 피어서 금강경을 푸르게 설법하는데 쇠북은 언제 울어 네게 닿을까 내 귀는 언제 열려 너를 품을까.  * 금강초롱 : http://blog.daum.net/j68021에서 옮김.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 시집 『독종毒種』(2012. 북인)    * 시「금강초롱」을 읽으면 ‘사랑’ ‘번민’ ‘고뇌’ ‘수양’ ‘인내’ ‘해탈’······ 등의 단어가 떠오르는데, 이런 단어에는 다분히 종교적 색채가 묻어난다. 금강초롱..

화사기花史記

화사기花史記 洪 海 里 하나 처음 내 가슴의 꽃밭은 열여덟 살 시골처녀 그 환한 무명의 빛 살 비비는 비둘기 떼 미지의 아득한 꿈 흔들리는 순수의 밀향密香 뿌연 새벽의 불빛 즐거운 아침의 연가 혼자서 피아프게 뒤채이던 늪 아침까지 출렁이며 울부짖는 꽃의 바람, 드디어의 개문開門. 둘 꽃밭의 꽃은 항상 은밀한 눈짓을 보내고 있었다 나의 눈썹은 현악기 가벼운 현의 떨림으로 겨우내 기갈의 암흑 속에서 눈물만큼이나 가벼이 지녀온 나약한 웃음을, 잔잔한 강물소리를, 그리고 있었다 조용한 새벽을 기다리는 꽃씨도 꽃나무도 겨울을 벗고 있었다 눈은 그곳에도 내리고 강물 위에도 흔들리며 쌓이고 있었다. 셋 내가 마지막 머물렀던 꽃밭엔 안개가 천지 가득한 시간이었다 돌연한 바람에 걷히는 안개 내해의 반짝이는 시간의 둘레에..

투망도投網圖

* 천윤우 시인의 페북에서 옮김.投網圖洪 海 里  無時로 木船을 타고出港하는 나의 意識은漆黑같은 밤바다물결 따라 흔들리다가滿船의 부푼 기대를 깨고歸港하는 때가 많다.投網은 언제나첫새벽이 좋다가장 신선한 고기 떼의빛나는 옆구리그 찬란한 純粹의 비늘반짝반짝 재끼는아아, 太陽의 눈부신 誘惑千絲萬絲의 햇살에잠 깨어 출렁이는 물결나의 손은 떨어바다를 물주름 잡는다.珊瑚樹林의 海底저 아름다운 魚群의 흐름을보아, 층층이 흐르는 무리나의 투망에 걸리는至純한 고기 떼를 보아잠이 덜 깬 파도는土着語의 옆구릴 건드리다아침 햇살에 놀라離船하는 것을 가끔 본다.破船에 매달려 온失望의 귀항에서다시 木船을 밀고 드리우는한낮의 투망은靑瓷의 항아리動動 바다 위에 뜬高麗의 하늘파도는 고갤 들고 날름대며外洋으로 손짓을 한다언제나 혼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