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은자隱者의 꿈

은자隱者의 꿈 洪 海 里 산 채로 서서 적멸에 든 고산대의 주목朱木 한 그루, 타협을 거부하는 시인이 거문고 줄 팽팽히 조여 놓고 하늘관棺을 이고 설한풍 속 추상으로 서 계시다. 현과 현 사이 바람처럼 들락이는 마른 울음 때로는 배경이 되고 깊은 풍경이 되기도 하면서, 듣는 이 보는 이 하나 없는 한밤에도 환하다 반듯하고 꼿꼿하시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한밤에도 환하다 시인의 정신은 무엇인가, 무엇이길래 "고산대의 주목 한 그루"처럼, 혹은 한겨울 나목처럼 "산 채로 서서 적멸에" 들며 "설한풍 속 추상으로 서" 있는 것일까. 시가 읽히지 않는 현실에서 시의 미래는, 시인의 정신은 어떠해야 하는가---들어보자. 순수예술, 혹은 기초과학이 무시되는 현실 속에서 여전히 隱者는, ..

소금쟁이

* 소금쟁이 : http://www.wholesee.com에서 옮김. 소금쟁이 洪 海 里 북한산 골짜기 산을 씻고 내려온 맑은 물 잠시, 머물며 가는 물마당 소금쟁이 한 마리 물 위를 젖다 뛰어다니다, 물속에 잠긴 산 그림자 껴안고 있는 긴 다리 진경산수 한 폭, 적멸의 여백! - 시집『봄, 벼락치다』(우리글, 2006) * 소금쟁이는 왜 소금쟁이인데 소금기 많고 너른 바다에 가서 살지 않고 그 비좁은 북한산 골짜기 물마당이나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얼마나 제 몸을 가볍게 비우고 비웠으면 물 속으로 가라앉지 않고 떠 있을까요. 무엇이 궁금하여 물을 저어보고, 뛰어다녀도 보다 산 그림자, 그 진경산수 한 폭을 껴안고 숨을 죽이고 있을까요. 아예 산그림자가 내려 오자 바다를 향해 서둘러 가던 계곡물도 흐름을..

김치, 찍다

김치, 찍다    洪 海 里     싱싱하고 방방한 허연 엉덩이들죽 늘어섰다 때로는 죽을 줄도 알고죽어야 사는 법을 아는 여자 방긋 웃음이 푸르게 피어나는칼 맞은 몸 바다의 사리를 만나얼른 몸을 씻고 파 마늘 생강 고추를 거느리고조기 새우 갈치 까나리 시종을 배경으로, 이제 잘 익어야지, 적당히 삭아야지우화羽化가 아니라 죽어 사는 생生 갓 지은 이밥에 쭉 찢어 척걸쳐놓고 김치! 셔터를 누른다.    * 홍해리 시인의 시는 싱싱한 맛을 지니고 있습니다.나이가 들면 시도 따라 늙기 마련인데, 홍 시인의 시는 젊음을 잃지 않습니다.그는 즐겨 남성적 시선으로 사물을 바라다봅니다. 사물들은 그의 앞에서 여성화하면서 관능적인 미를 발휘합니다.그의 작품이 젊게 읽힌 것은 바로 그 관능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김..

팽이는 때려야 돌고 돌아야 선다

팽이는 때려야 돌고 돌아야 선다 洪 海 里 멈춘 팽이는 죽은 팽이다죽은 팽이는 팽이가 아니다토사구팽이다멈추면 서지 못하는팽이를 때려 다오돌아서 서도록 쳐 다오너의 팽이채는 쇠좆매,윙윙 울도록 때려 다오 중심을 잡고불불대도록,불립문자가 되도록 쳐 다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멈춘 팽이” “죽은 팽이” “토사구팽”으로 이어지는 말의 연쇄만 본다면 이 시는 그다지 새로울 게 없다. 이미 오래전에 시인은 그 말의 재미가 오를 수 있는 높은 경지를 시험했고 또 보여주었다. 최소한 이번 시집에서 시인의 말은 놀이가 주는 쾌감을 넘어서고 있다. 이 시에서는 그 말의 부딪힘이 언어를 통해 한 번 더 새로워진다. 시인은 죽은 팽이를 살리듯 자신의 언어..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숫돌은 자신을 버려 칼을 벼린다 洪 海 里 제 몸을 바쳐 저보다 강한 칼을 먹는 숫돌, 영혼에 살이 찌면 무딘 칼이 된다. 날을 세워 살진 마음을 베려면 자신을 갈아 한 생生을 빛내고, 살아 남기 위해서는 버려야 한다. 서로 맞붙어 울어야 비로소 이루는 상생相生, 칼과 숫돌 사이에는 시린 영혼의 눈물이 있다. - 시집『봄, 벼락치다』(2006, 우리글) * 이 시는 사물과 사물의 관계를 통해 배려의 미학을 되새기고 있다. ‘되새기고 있다’라 함은 누구에게 설파하는 것이 아니라 시인 스스로가 곰곰이 생각하는 어투라는 의미다. 혹여 자신의 영혼은 과대하게 살찌지 않았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것을 벼리는 일이 남았을 것인데, 벼리는 것을 시인은 상생相生으로 그 의미를 도출해 낸다. 칼은 무뎌진 자신의 날을 벼리..

황태의 꿈

황태의 꿈 洪 海 里 아가리를 꿰어 무지막지하게 매달린 채 외로운 꿈을 꾸는 명태다, 나는 눈을 맞고 얼어 밤을 지새우고 낮이면 칼바람에 몸을 말리며 상덕 하덕에 줄줄이 매달려 있는 만선의 꿈 지나온 긴긴 세월의 바닷길 출렁이는 파도로 행복했었나니 부디 쫄태는 되지 말리라 피도 눈물도 씻어버렸다 갈 길은 꿈에서도 보이지 않는 오늘밤도 북풍은 거세게 불어쳐 몸뚱어리는 꽁꽁 얼어야 한다 해가 뜨면 눈을 뒤집어쓰고 밤을 지새운 나의 꿈 갈가리 찢어져 날아가리라 말라가는 몸속에서 난바다 먼 파돗소리 한 켜 한 켜 사라지고 오늘도 찬 하늘 눈물 하나 반짝인다 바람 찰수록 정신 더욱 맑아지고 얼었다 녹았다 부드럽게 익어가리니 향기로운 몸으로 다시 태어나 뜨거운 그대의 바다에서 내 몸을 해산하리라. - 시집『비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