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1

죄받을 말

죄받을 말 - 치매행致梅行 · 262 洪 海 里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가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점점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눈물 부자

눈물 부자 - 치매행致梅行 · 239 洪 海 里 내 몸이 물이었구나 내 눈이 샘이었구나 나이 들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 울리네 딸을 시집보내면서 울고 친구가 먼저 떠나가 울고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 인간이 한 생을 살면서 겪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웃음꽃 피우는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흔히 오늘의 세대를 눈물도 없는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어느 상갓집에 가보아도 눈물을 흘리며 우는 상주를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굴건제복을 하고 문상객을 맞으면 반드시 곡(哭)을 했습니다. 그게 망자를 보내는 예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승을 떠난 자를 위해 울고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시..

자식들에게

자식들에게 - 치매행致梅行 · 218 洪 海 里 어느 날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있다고 놀라지 말 일이다 세상이 다 그렇고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말이 없다고 놀라지 마라 이미 말이 필요 없는 행성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았으니 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천지가 경련을 해도 그리워하지 마라 울지 말거라 유채꽃 산수유꽃 피면 봄은 이미 나와 함께 와 있느니.

역설

역설 - 치매행致梅行 · 230 洪 海 里 "오늘 밤 잠이 들면 깨어나지 말기를, 내일 아침 해 떠도 눈을 뜨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그러면서도, 밥 같이 먹을 사람 곁에 있으니, 한잔 술 나눌 사람 옆에 있으니, 내 몸 누일 한 평 방 내게 있으니, 천천히 산책할 길 앞에 있으니, 아낌없이 주는 자연 속 내가 있으니, 시를 낳고 안는 행복 또한 나의 것이니, "오늘 밤에 잠들면 깊은 잠 자고 내일 아침 해 뜨면 깨어나기를!" * 홍해리 시인이 아내의 병상에서 쓴 시 『치매행致梅行』에 이어 20번째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이 출간되었다. 한자어 『치매행致梅行』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 - 치매행致梅行 · 212 洪 海 里 지상에 떨어져 나와 한평생 피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백목련 꽃봉오리 위 푸른 나뭇그늘 가을 들녘의 논두렁 밭둑 눈 내리는 순백의 적막을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앞장선 여린 아내 뒤따르는 못난 사내. 집은 저 먼 곳에 있고 뚜벅뚜벅 나를 찾아가는 뭍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가는, 우주 산책길!

절해 고도

절해 고도 - 치매행致梅行 · 203 洪 海 里 사방이 문이라도 나갈 문 하나 없고 어디든 길이라도 갈 길이 없습니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본 게 언제였던가 가리산지리산 헤매는 어둠 속 소리칠 줄 모르는 바위 하나 봅니다 천년 세월이 빚은 말씀의 경전 산것들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바위 얼굴의 빛깔과 무늬를 읽으며 가는 길이 늘 꽃길일 순 없다 해도 문 열고 갈 길을 내다볼 수 있기를 오늘도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출렁이는 막막한 바다를 생각하다 시거에 바닷속으로 뛰어듭니다.

두덜두덜

두덜두덜 - 치매행致梅行 · 188 洪 海 里 화가 나서 못 살겠다 못 살겠다 두덜두덜 넋두리를 합니다 밥을 먹는 건지 잠을 자는 건지 멍멍한 세상 눈이 침침하고 골이 띵합니다 화는 죽이고 못은 뽑아 버리면 그만 살맛 나는 세상인데 왜 못을 못 빼고 화만 내는가 장도리가 없는가 노루발이 없는가 넘어야 할 산은 넘지 않고 그 너머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떼쓰고 앙탈하며 승강이하다 억지로 아내는 차에 올랐습니다 돌아서는 내 발걸음이 천근만근입니다 때찔레꽃 한 송이 피워 올릴 조그만 마음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점점 지쳐 버리는 내가 한심합니다.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 치매행致梅行 · 187 洪 海 里 어쩌다 실수로 아내의 치매약을 먹었습니다 그날 밤 꿈속에서 하염없이 거리를 헤맸습니다 집으로 가는 방향을 찾지 못하고 걸어다니는 일도 차를 타는 것도 다 잊은 상태 아무것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허우적허우적거리다 때로는 허공을 날기도 했습니다 며칠 전 길을 잃고 헤맨 아내 그 뒤를 쫓아다녔는지도 모릅니다 여덟 시간 미아가 되었던 아내의 긴 세월을 하룻밤 꿈으로 대신했나 봅니다 아내의 치매약으로 다른 한세상을 구경한 내가 약도 없는 치매환자가 되어 환한 대낮에 길을 잃고 허청댑니다 한세월하지 못하고 허둥대는 나 한술 더 떠 길을 찾지 못하고 헤맵니다 집은 어디 있는가? * 시를 읽으면서 영화 한 편, 그림 한 편이 연상되었다. 영화는 ‘집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