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2021) 122

마지막 편지

마지막 편지 - 치매행致梅行 · 264              洪 海 里  마음 다 주었기로할 말 없을까. 천금보다 무거운물 든 나 뭇 잎 한 장 떨 어 진 다. 꿈이나 눈부실까내 주변만 맴돌다, 아내는 지쳤는지다 내려놓고 나서, 마지막 가슴으로 찍는 말무언의 '할말없음!'    * 무엇이 남았을까. 다 덜어주고 남은 말이 궁금할 때마다 나는 귀를 기울였지만, 이후로 당신의 말은 ‘말 없는 말’이었다.눈빛의 언어 또는 몸을 뒤척이는 일은 당신이 나중까지 남겨놓은 말이다.그러니 내가 가까이 가는 모양은 소리를 받으려는 것이 아니다.  눈에 눈을 대고 들어가 마음의 언어를 읽는다.기우는 몸을 붙잡고 몸이 내려놓는 말을 받는다.눈을 마주치고 낮은 자세로 받아 적는 말이 오늘은 마지막 편지인가 싶다가도 내일 또..

죄받을 말

죄받을 말 - 치매행致梅行 · 262 洪 海 里 아픈 아내 두고 먼저 가겠다는 말 앓는 아내를 두고 죽고 싶다는 말 하지 말아야 하는데 해서는 안 되는데 내가 왜 자꾸 이러는지 어쩌자고 점점 약해지는지 삶의 안돌이 지돌이를 지나면서 다물다물 쌓이는 가슴속 시름들 뉘게 안다미씌워서야 쓰겠는가 내가 지고 갈, 내 안고 갈 사람.

눈물 부자

눈물 부자 - 치매행致梅行 · 239 洪 海 里 내 몸이 물이었구나 내 눈이 샘이었구나 나이 들면 눈물이 흔해진다더니 보는 것 듣는 것마다 날 울리네 딸을 시집보내면서 울고 친구가 먼저 떠나가 울고 "울지 말자, 울지 말자!" 하면서도 말없이 누워 있는 사람 보며 또 우네! * 인간이 한 생을 살면서 겪는 일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입니다. 웃음꽃 피우는 일이며 눈물을 흘리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흔히 오늘의 세대를 눈물도 없는 세상이라고들 합니다. 어느 상갓집에 가보아도 눈물을 흘리며 우는 상주를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조상들은 굴건제복을 하고 문상객을 맞으면 반드시 곡(哭)을 했습니다. 그게 망자를 보내는 예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이승을 떠난 자를 위해 울고 눈물을 보이는 경우는 거의 없는 시..

자식들에게

자식들에게 - 치매행致梅行 · 218 洪 海 里 어느 날 둘이서 나란히 누워 있다고 놀라지 말 일이다 세상이 다 그렇고 세월이 그런 걸 어쩌겠느냐 말이 없다고 놀라지 마라 이미 말이 필요 없는 행성에서 할 말 다 하고 살았으니 말이 없는 게 당연한 일 천지가 경련을 해도 그리워하지 마라 울지 말거라 유채꽃 산수유꽃 피면 봄은 이미 나와 함께 와 있느니.

역설

역설 - 치매행致梅行 · 230 洪 海 里 "오늘 밤 잠이 들면 깨어나지 말기를, 내일 아침 해 떠도 눈을 뜨지 않기를!" 그러면서도 그러면서도, 밥 같이 먹을 사람 곁에 있으니, 한잔 술 나눌 사람 옆에 있으니, 내 몸 누일 한 평 방 내게 있으니, 천천히 산책할 길 앞에 있으니, 아낌없이 주는 자연 속 내가 있으니, 시를 낳고 안는 행복 또한 나의 것이니, "오늘 밤에 잠들면 깊은 잠 자고 내일 아침 해 뜨면 깨어나기를!" * 홍해리 시인이 아내의 병상에서 쓴 시 『치매행致梅行』에 이어 20번째 시집 『매화에 이르는 길』이 출간되었다. 한자어 『치매행致梅行』을 우리말로 풀어 쓴 것이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매화에 이르는 길이다. 무념무상의 세계,..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길 - 치매행致梅行 · 212 洪 海 里 지상에 떨어져 나와 한평생 피다 돌아가는 길입니다. 백목련 꽃봉오리 위 푸른 나뭇그늘 가을 들녘의 논두렁 밭둑 눈 내리는 순백의 적막을 지나 이제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도 없는 집으로 앞장선 여린 아내 뒤따르는 못난 사내. 집은 저 먼 곳에 있고 뚜벅뚜벅 나를 찾아가는 뭍인지 물인지도 모르고 가는, 우주 산책길!

절해 고도

절해 고도 - 치매행致梅行 · 203 洪 海 里 사방이 문이라도 나갈 문 하나 없고 어디든 길이라도 갈 길이 없습니다 하늘 한 번 올려다보고 땅 한 번 내려다본 게 언제였던가 가리산지리산 헤매는 어둠 속 소리칠 줄 모르는 바위 하나 봅니다 천년 세월이 빚은 말씀의 경전 산것들 눈물나게 하지 말라는 바위 얼굴의 빛깔과 무늬를 읽으며 가는 길이 늘 꽃길일 순 없다 해도 문 열고 갈 길을 내다볼 수 있기를 오늘도 소리 없이 울부짖으며 출렁이는 막막한 바다를 생각하다 시거에 바닷속으로 뛰어듭니다.

두덜두덜

두덜두덜 - 치매행致梅行 · 188 洪 海 里 화가 나서 못 살겠다 못 살겠다 두덜두덜 넋두리를 합니다 밥을 먹는 건지 잠을 자는 건지 멍멍한 세상 눈이 침침하고 골이 띵합니다 화는 죽이고 못은 뽑아 버리면 그만 살맛 나는 세상인데 왜 못을 못 빼고 화만 내는가 장도리가 없는가 노루발이 없는가 넘어야 할 산은 넘지 않고 그 너머만 그리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유치원에 안 가겠다고 떼쓰고 앙탈하며 승강이하다 억지로 아내는 차에 올랐습니다 돌아서는 내 발걸음이 천근만근입니다 때찔레꽃 한 송이 피워 올릴 조그만 마음자리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점점 지쳐 버리는 내가 한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