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마흔아홉 마흔아홉 홍해리(洪海里) 이제 마흔 아홉 세상이 이만큼 몸을 풀고 다가오네 어느 새 쓸쓸한 어깨의 가을빛 스산한 바람의 앙상한 손등 마흔 살 성긴 뼈마디 사이마다 삐걱삐걱 문을 여는 소리 목마르던 삶의 초록빛 꽃대궁에 펼쳐지던 황홀한 잔치 한때의 기쁨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안개와 는개, 어..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다비시 茶毘詩다비시 홍해리(洪海里) 목욕재계한 뒤 깨끗이 껍질을 벗긴 소나무 등걸로 정성 모아 불을 지펴 백자 항아리를 낳듯 내 몸의 기름을 다 짜내고 하얀 뼈 마디마디 추려 모아서 그대를 모셔다 사루옵나니 하늘로 오르는 연기 한 점 없이 금빛 은빛으로 빛나는 말씀의, 끝내 깊이 품고 있던 한 마디 ..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아카시 아카시꽃 홍해리(洪海里) 가시나무 꽃피어 여름이 오네 그대의 사랑빛이 저리 하리야 소리 없이 눈물만 뿌리는 여인 산자락에 머리 풀고 홀로 울어라 이슬 젖은 소복이 하늘에 뜬다 떼로떼로 파고드는 젖빛 그리움 떠나간 그 님은 소식도 없고 서편 하늘 노을만 섧게 젖누나.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별빛 미학 별빛 미학 홍해리(洪海里) 홀로 있을 때나 함께 있을 때나 몸도 마음도 다 비워 당신께 드리나니 비어 있는 자리를 채우시든지 그냥 비어 있게 하시든지 푸른 하늘 흰 구름 솔바람 소리 속살로 속살대는 속치마 하얀 빛깔 다만 그런 것들로 채우시든지 비록 별이 없는 밤이라도 별빛 받아 빛나는 별이 ..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등잔 불빛 아래 잠 속에서 등잔 불빛 아래 잠 속에서 洪 海 里 시대는 어둠 세상만사 바람 앞의 등불이었다 천지의 칠흑 무한 자궁 속 홀로 잠들어 꿈으로 들면 천년 어둠이 흘러왔다 흘러가는 모습이 보였다 귀를 열면 문득문득 들려오는 짜르르 심지를 타고 오르는 기름소리 하나의 끈으로 우주를 밝히면서 빈 곳..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늦은 봄 늦봄 홍해리(洪海里) 꽃잎이 피고 있었다 눈맞춘 사내 집마당으로 날아드는 옥색 고무신 젖은 눈으로 댓돌 위에 기다리는 흰 고무신 꽃잎이 지고 있었다.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고풍조 古風調고풍조 홍해리(洪海里) 혀와 혀 사이 천 마리의 새가 날고 있다 황금빛 순은빛 울음을 노래하며 (남들이 다 써먹은 고풍조로) 귓속에 보금자리 틀고 다시 비상하고 있다 천 마리 천 가지 춤을 추며 (이미 다 꺾여진 고풍조로).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늦은 봄날 늦은 봄날 홍해리(洪海里) 아카시아 필 때는 눈이 맑아라 잔잔한 물 속 송사리 떼 노닐고 뻐꾸기 이산 저산 울어 옐 때는 길가의 잡초도 임자 없는 애를 밴다.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밤꽃이 피면 밤꽃이 피면 홍해리(洪海里) 동네방네 홀어미들 독수공방에 오늘 저녁엔 보름달이 떠오르네 실실이 속옷 벗어 천지 가득 던져 놓고 인수봉 타고 올라 하늘 위에 뜨네. 차라리 싸늘하게 피어오르는 저 뜨거움 달뜬 심장 천둥이 쳐 눈앞이 캄캄하네 떼과부들 피미쳐 오늘밤엔 파산을 하고 ..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
<시> 꽃 지는 사월에 꽃 지는 사월에 홍해리(洪海里) 목련꽃 그늘 아래 술상 펼치니 가지마다 눈빛 고운 촛불 밝히고 신부들이 떼로떼로 날아오르네 날개옷 하늘하늘 흐느적이며 가물가물 가물가물 사라져 가네 억장 무너지는 가슴벼랑에 어쩌자고 벌들은 온종일 잉잉대고 술맛도 소태맛 꽃잎만 지네. 시집『은자의 북』1992 2005.11.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