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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마의 봄 · 2

늙마의 봄 · 2 홍 해 리 나일 먹고 또 나이 들어도 그림 속 떡을 보고 침을 흘리고 사촌이 땅을 사면 축하할 일인데 왜 아직도 내 배가 아픈 것인가 어느새 깨복쟁이 멱감던 개울가를 돌아보고 사철나무 서 있던 우물가를 서성이는 늙마의 봄이 오니 볼 장 다 보고 나서도 휘영청 달 밝은 밤이 되면 하늘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데 봄이 오면 정녕 고목에도 꽃이 피는 그곳으로 발밤발밤 가 볼 것인가 발바투 달려갈 것인가 무한 적막은 어떻게 잡고 영원은 또 언제 그릴 것인가 봄이 와도 봄이 아닌 나의 봄이여. - 계간 《창작21》 2024. 봄호.

얼음폭포

얼음폭포 洪 海 里 천년을 소리쳐도 알아듣는 이 없어 하얗게 목이 쉰 폭포는 내리쏟는 한 정신으로 마침내 얼어붙어 바보 경전이 되었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2016, 도서출판 움) * 얼어붙은 폭포를 노래하였다. 마음이 울린다. 그러다가 한동안 마음이 얼어붙는다. 왜 이 시는 따뜻한가. 폭포를 보고 말하되 폭포에만 머무르지 않고 시인의 ‘인간을 향한 감수성’이 폭포와 함께 떨어지다가 얼어붙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읽는 이의 마음도 폭포처럼 목이 쉬도록 경전을 읽다가 얼어붙고 마는 것이다. 시는 풍경화만으로 끝났을 때는 읽은 이의 마음을 울릴 수 없다. 독자의 마음을 울릴 수가 없다면 좋은 시가 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독자들은 그 시를 좋은 시라고 말하지 않는다. 인간 사..

지금 여기

지금 여기 洪 海 里 이곳 내 생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내일도 없는 거지중천居之中天 별 하나 반짝이고 있네. 지금 여기 홍 해 리 이곳 내 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없고 내일도 없네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별 하나 반짝이고 있네. *ㅔ : 데/ 네/ 에/ 네 지금 여기 홍 해 리 이곳 내 生의 한가운데 어제도 내일도 없는 거지중천居之中天에 별 하나 반짝이고 있는. * 데/ 는/ 에/ 는.

매화꽃 피고 지고

정옥임(시인). 매화꽃 피고 지고 홍 해 리 심학규가 왕비인 딸 청이 앞에서 눈을 끔적끔쩍 세상을 보듯 매화나무가 겨우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있다 빈자일등貧者一燈이 아니라 천등만등이 하나 둘 켜지면서 가지마다 암향暗香이 맑고 푸르다 다글다글 꽃봉오리가 내뿜는 기운으로 어질어질 어질머리가 났다 계집이 죽었는지 자식이 죽었는지 뒷산에서 구성지게 울어쌓는 멧비둘기 봄날이 나울나울 기울고 있다 시인은 매화꽃이 두근두근 댄다고 했다 꽃 터지는 소리가 그만 절창이라고 했다 한 사내를 사랑한 여인의 가슴이 삼복三伏 염천炎天이어서 두향杜香이는 죽어서도 천년 매화꽃 싸늘하게 피우고 있다 - 「매화꽃 피고 지고」 전문 홍해리 선생님은 이번에 『이별은 연습도 아프다』라는 치매 연작시집 4권째를 내셨다. 제1시집 『치매행致..

치과에서 - 치매행致梅行 · 331 / 이인평(시인)

치과에서 - 치매행致梅行 · 331 洪 海 里 아내는 밥도 못 먹고 누워만 있는데 나만 잘 먹고 살자고 새 치아를 해 넣다니 뼈를 파고 쇠이빨을 박다니 내가 인간인가 이게 사람이 할 짓인가. 공간시낭독회 2020. 9월. 제482회 인간으로서, 사람으로서 할 짓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짓이 있다는 것을 중심으로 자기 성찰의 의미를 짙게 새긴 시네요. 이미『치매행致梅行』 시집을 발간한 바 있고, 이 연작시를 끊임없이 써서 331편에 해당하는 이 시를 통해, 치매에 걸린 아내를 두고 자신의 처지를 비교하는 시상이 너무 진솔 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더욱 안타까운 마음을 갖게 하네요. 요즘엔 누구나 쉽게 하는 임플란트 기술에 의해 이빨 건강이 많이 좋아졌지요. 하지만 화자 는 아내의 처지에 비추어 치아의 건강을..

여국현 저『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表辭

여국현 著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 지난 몇 해 동안 월간 《우리詩》에 연재된 여국현 교수의「영시 해설」에 소개되는 시를 읽으면서 나는 60년대 초의 강의실로 되돌아가 있었다. 그때는 그렇게 어렵고 이해하기 힘들었던 작품들을 우리말의 맛깔스런 말맛을 살린 여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만나게 되니 마치 우리 시를 읽는 느낌이 들었다. 번역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작업인가. 더구나 시의 번역은 원시原詩의 맛과 향기를 놓치기 쉬우니 더욱 그렇지 아니한가. 「세상과 자연 속에서 사랑하며」, 「인생, 삶과 죽음 사이 아름다운 청춘」이란 부제를 단 『강의실 밖으로 나온 영시(1·2)』에서 사랑, 자연, 사회, 인생, 미美, 삶과 죽음을 다룬 주옥같은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이번에 엮은 두 권의 해설서가 ..

가을 들녘에 서서 /경상일보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이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는 것이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 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 겨운 마음 자리도 스스로 빛나네. [ 詩를 읽는 아침 ] • 홍해리 • 경상일보 2014.11.13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가져서 반에 반도 못보고 반에 반도 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잎이 무성한 계절에 보이지 않던 것들은 모든 걸 떨구고 난 뒤에야 적나라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둥글게 보이던 나무가 예리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갖가지 형색으로 눈길을 끌던 풀꽃들이 누렇게 마를 때야 동색의 집단이었던 것도 알게 됩니다. 버리고 채우기를 반복하면서 자연은 순환을 하지만 사람은 평생을 채우려고 하면서 살아갑니다. 가볍게 떠나야할 때가 왔는데도 놓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