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근황 일지 근황일지 홍해리(洪海里) 돌아서 가는 사람들의 등에 꽂히는 살이 보인다 살을 날리는 바람소리도 보인다 골목의 온갖 풍경에 눈멀고 귀먹은 빛이 꽃밭에 와서도 눈이 뜨이지 않고 귀가 스스로 밝혀지지 않는다 풀 한 포기 다시 솟아오르고 꽃봉오리가 수없이 터져도 말은 혀 속 깊이 갈..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보길도 보길도甫吉島 홍해리(洪海里) 적자산 기슭마다 난蘭은 지천으로 피고 있었다 고추를 쏘옥쏘옥 내미는 해묵은 클리토리스 봄이면 바람과 안개가 얼린다 안개를 뚫고 달리는 바람 바람을 싸고도는 안개자락 그 짓거리이듯 꽃을 피워대면서 적자산은 조용히 피고 있었다 동백나무 자르르 ..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춘곤 춘곤春因 홍해리(洪海里) 들길을 돌아오는 비인 달구지 쓸쓸한 황혼만 가득 태우고 바퀴 아래 깔리는 자갈만 억울하다 무성한 보리밭을 지날 때에도 황소방울은 울리지 않고 고달픔만 어깨에 굳은살로 쌓인다 밤새도록 밀려오는 해일을 막소주 한잔에 내어맡기고 죽음 곁으로 죽음 곁으..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할 말 없음 할 말 없음 홍해리(洪海里) 한 시대의 뒷꽁무니에 헐떡이면서 무슨 할 말이 있으랴 시인이여 할 말 없어라 길 잘 든 개들은 낮에도 하늘에다 컹컹컹 짖으며 앞서 달리는데 시인이여 할 말 없어라 없어라 4월은 돌아와 나뭇가지마다 푸른 싹이 돋아나고 짖밟힌 질경이도 일어서는데 한 시..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아스피린 아스피린 홍해리(洪海里) 약국 앞을 지날 때마다 가슴에 스치는 하얀 구름 집에서 앓고 있는 어린 아이들 뜨거운 이마엔 열이 높고 하얗게 바랜 목구멍엔 가래가 끓는다 기침소리도 이젠 세어서 겨울바람처럼 칼칼 허공을 끊고 있다 참숯이 피고 있는 가슴 속 목구멍을 넘어간 알약 몇 알..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겨울밤에 깨어서 겨울밤에 깨어서 홍해리(洪海里) 깊은 밤의 칠흑을 다 이겨서 전신으로 빚어내는 긴긴 밤을 갈증으로 출렁이는 해일같이 넘쳐나는 슬픔으로 빚어내는 가슴속 활활 지피는 열기 그 짙은 흙냄새로 빚어내는 아름답고 곧은 말씀 하나를 그대는 멀리 서서 바라만 보고 한 걸음 다가서면 두 ..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김석규 - 『닭은 어제 우는가』에 부쳐 김석규 - 시집『닭은 언제 우는 가』에 부쳐 洪 海 里 흰옷 입고 뒹구는 푸른 풀밭이다 삼천포에서 일어난 바람이다 비봉산 아래 울고 있는 뻐꾸기다 잠 못 들고 뒤척이는 삼사경이다 남강물은 혼자서 깨어 있다 섣달 그믐날의 숯검정이다 장터 주막집 늪을 헤쳐 일어난 사랑이다 가을길..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보리밟기 보리밟기 홍해리(洪海里) 보리밟기 / 洪海里 늙으신 어머님의 주름진 얼굴 같은 보리밭에 서서 밭고랑을 따라가며 보릴 밟는다 부스스 들떠오르는 팔다리마다 대지모신大地母神의 품에 꼭꼭 안겨 꿋꿋이 일어서라 꼭꼭 밟으면 한겨울의 어둠과 추위를 털고 아지랑이 따스한 햇살을 받아..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말복 말복末伏 홍해리(洪海里) 드디어 눈이 맑아지고 감청에서 암록으로 다시 기름기가 걷히고 남는 백색 여운 한 시대도 도장徒長했던 이파리들도 무덥고 기인 밤이 지나면 제자리로 돌아오고 균형이 잡혀 이마에 와 부딪히는 물빛 바람빛 산빛 구름빛 살빛도 그물에 걸리지 않고 눈으로 가..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
<시> 한란 곁에서 한란寒蘭 곁에서 홍해리(洪海里) 한겨울 솔바람소리 기나긴 밤은 짙어가고 얼어붙은 어둠을 카알 칼 자르고 있을 때 초저녁에 지핀 군불도 사그러들어 눈 쌓이는 소리만 유난스레 온 산 가득 들녘에까지 무거이 겹칠 때 은일한 선비들 칠흑을 갈아 휘두르는 묵필 끝없이 밤은 깊어가고 .. 시집『우리들의 말』1977 2005.1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