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치매행致梅行』(2015) 158

어느 날 문뜩 - 치매행 · 7

어느 날 문뜩 치매행致梅行 · 7 洪 海 里 아내 얼굴을 보지 않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늘 아늠 곱고 젊을 줄만 알았습니다 어느 날 문뜩 마주친 아내 주름지고 핏기 가신 창백한 모습 아내가 아니었습니다 아늘아늘하던 아내는 어디 가고 낯선 사람 하나 내 앞에 서 있습니다. ================================ http://donbosco.pe..kr 전순란 여사의 '휴천재 일기' 2014. 6. 3. (화) 하루종일 가랑비 점심상에서 보스코가 “여보, 우이동 홍해리 시인이 치매 걸린 자기 아내의 사연을 일 년간 시로 쓰겠데. 6월호에 첫 회분이 실렸어.”란다. 아예 제목부터 “치매행(癡呆行)” 아닌 “치매행(致梅行)”이라고 붙여놓았다. 아내의 얼굴을 보지 않고 한평생 살았습니다 늘 아늠..

손톱 깎기 - 치매행 · 5

손톱 깎기 - 치매행致梅行 · 5 洪 海 里 맑고 조용한 겨울날 오후 따스한 양지쪽에 나와 손톱을 깎습니다 슬며시 다가온 아내가 손을 내밉니다 손톱을 깎아 달라는 말은 못하고 그냥 손을 내밀고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겨우내 내 손톱만 열심히 잘라냈지 아내의 손을 들여다본 적이 없습니다 손곱도 없는데 휴지로 닦아내고 내민 가녀린 손가락마다 손톱이 제법 자랐습니다 손톱깎이의 날카로운 양날이 내는 금속성 똑, 똑! 소리와 함께 손톱이 잘려나갑니다 함께 산 지 마흔다섯 해 처음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손톱을 잘라 줍니다 파르르 떠는 여린 손가락 씀벅씀벅, 눈시울이 자꾸만 뜨거워집니다. -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황금마루) * 화자는 치매에 걸린 아내와 같이 지내는 남편입니다. 손톱을 깎고 있는 남편에게 치매..

어린아이 - 치매행 · 4

어린아이 -치매행致梅行 · 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 홍해리 시인이 이란 시집을 냈다. ‘시인의 말’에서 홍해리 시인은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무념무상의 세계, 순진하고 무구한 어린아이가 되는 병이 치매다.‘라고 말하고 이 시집을 치매 환자를 돌보고 ..

다저녁때 - 치매행致梅行 · 1

다저녁때 - 치매행 · 1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들 다 들어도 얼마나 황홀하고 아련했던지, 빛나던 기억 한꺼번에 내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사는 슬픈 꿈이 아름답고 아름다운 삶이 아득한, 아침에 내린 눈 녹지도 않은 다저녁때 아내가 또 길을 나섭니다. - 월간《우리詩》2014. 4월호 * 치매는 치매癡呆가 아니라 치매致梅라 함이 마땅하다. 무념무상의 세계의 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