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404

늙은 첫눈

늙은 첫눈 洪 海 里 나이 들어도 첫눈이 오니 들뜨는 심사 어쩔 수 없네 눈길에 미끌어질까 눈길을 던지며 설설 길 생각은 접어 두고 고갤 설레설레 흔들면서도 눈처럼 흰 눈썹[雪眉]을 그리다니 설이雪異 분분粉粉한 날 뒤범벅된 진흙길은 생각도 않고 강아지처럼 설레는 서화瑞花가 꽃 피는 세밑에 마침내 나이 든 눈이 내려 동화 속 설국으로 나를 이끄네.

이태원공화국

이태원공화국 洪 海 里 그날 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경찰은 어디 가서 자고 있는지 공무원도 어느 곳을 산책 중이었는지 순진한 발자국만 골목마다 물밀듯이 모여들고 무정부시 해방구 해밀턴로 159엔 젊은 열정만 파도쳤다 풍랑 심한 밤바다 사공 한 사람 보이지 않고 거센 폭풍만 절벽을 때리고 있었다 일순 밀리고 떼밀리고 넘어지고 무너지고 나가넘어지고 쓰러지고 나뒤쳐지고 엎어지고 나둥그러지고 자빠지고 고꾸라지고 채이고 치이고 꺼꾸러지고 밟히고 넘어박히고 깔리고 나가떨어지고 눌리고 덮이고~~~ "사람이 죽고 있어요. 도와주세요, 제발!" 아무리 소리쳐도 들리지 않는 절망의 세상에서 미쳐 피어보지도 못하고 낙화, 낙화, 죄없는 슬픈 꽃들이 파괴되고 있었다 산다는 게 이런 것인가 아니다 사는 게 ..

초라함에 대하여

초라함에 대하여 洪 海 里 1. 하늘은 가까운데 하루가 길다 세상 사는 일 길고 짧은 게 무엇인가 퍼져나갔던 꿈도 줄어들다 끝내 사라지면 그뿐. 2. 명작이고 걸작이라고? 완성하지 못하고 손 놓은 것일 따름 이미 쓰고 그린 글과 그림에 붓을 대지 않는 이 시인인가? 화가인가? 하루가 너무 지루한데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물처럼 바람처럼

물처럼 바람처럼 洪 海 里 꿈속에서 꿈같은 시절 누렸다고 부디 수수꾸지 말아 다오 발이 없어도 못 가는 곳 없는 바람처럼 낮은 곳만 찾아 서슴없이 가는 물같이 오늘도 불어가고 내일도 흘러서 갈 척행隻行의 길! 너는 네 혀로 말하고 나는 내 귀로 듣는 네 말 다 지우고 내 말 다 사라진 곳으로 나 가리라 나가리라 무하유지향으로! * 퇴고 중인 초고임.

톺고 톺아보고

톺고 톺아보고 洪 海 里  국밥도 몇 차례 토렴을 하고 나야따뜻한 진국이 입 안에 돌 듯 헛물로 메케하던 시휘영청 시원스런 세상으로 들려면늙마의 괴나리봇짐만큼이라도맛을 살려내야지 쓸데없는 짓거리 작작 하고씻나락 같은 시어 잘 불려 놓았는데"우리 밥 한번 먹자""언제 술 한잔하자" 하는 소리 듣지 않도록 너는 네 혀로 말하고나는 내 귀로 듣는 세상 사는 일 참 아프지 않도록쓸쓸하지 않도록

살아야 하니

살아야 하니 洪 海 里  슬픔이 슬금슬금 다가왔다 그 뒤를 따라 또 다른 슬픔이 또 다른 슬픔을 이끌고줄지어 달려왔다슬픔이란 아픔이란 그런 것이었다 기쁨은 오다 말고 돌아서버렸다 즐거움도 역시 그랬다기쁨이나 즐거움은 도두 쌓거나 낮추 놓지 않았다'재차', '한 번 더', '되풀이하여'는 없었다 기쁨이 슬픔에게즐거움이 아픔에게따뜻이 밝혀주는 등불이라면 오감하겠네.

운화雲華

운화雲華 洪 海 里  지상에 첫서리가 내리고푸나무마다 꽃과 열매를 내려 놓을 때드디어,차나무는 찬 하늘 바람을 모아노란 꽃술, 하얀 꽃을 터뜨려지난해 맺은 열매와 상봉을 하고서리 하늘에 영롱한 등을 밝힌다사람들은 따뜻한 한 모금의 물로가슴속을 데워 마음을 씻노니천지가 하나 되어 나를 깨우네. * 雲華는 차꽃을 시적으로 이르는 말.

자연법

자연법 洪 海 里 몸 소리치는 대로 마음 대답하고 마음 부르는 대로 몸 응대하니 춤추고 노래하라 기뻐하고 슬퍼하라 마음 가는 대로 몸 따라가고 몸 이끄는 대로 마음 뒤따르니 나무를 보라 새를 보라 구름 없는 청산 얼마나 외로운가 마음 떠난 몸 어디로 가나 몸 잃은 마음 어디서 떠도나 몸과 마음, 마음과 몸 응달진 마음자리 쏟아지는 가을볕 아닌가. - 월간 《우리詩》 2023. 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