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403

내 귀에 임자 없는 귀신이 산다

내 귀에 임자 없는 귀신이 산다洪 海 里  내 귀에는 소리싸움을 하는 귀신귀의 신이 살고 있네시도 때도 없이우렁우렁 울어 쌓는 안귀신과 바깥귀신말과 소리가 뒤엉겨 난장판이네아프다는 말 하기 싫어서그대에게 안부를 묻지 못하네그냥 안밀하게 지낸다고먼 하늘 바라보며 문안하노니그대 창 밖에 흰 구름장 흘러가거든내 기별이려니 여기시게나그대 소식을 귀담아듣지도 못하고귀넘어듣는 것도 아닌데세상은 귀 밖으로 천리만리라네! 시작 노트>얼마 전부터 귀가 소란하기 그지없다. 의사는 이것도 나이 들어얻은 축복이니 즐기면서 살라 하지만 이게 무슨 꼴이란 말인가.대낮에도 귀가 어둡다. 대명천지에 어둠을 즐겨야 하는 내 귀의설움이라니! 사실을 말하자면야 이 어수선하기 짝이 없는 세상에들을 만한 소리도 없다. 시끄러운 세상 귀 닫고..

시천詩泉 - 曉山 김석규

시천詩泉- 曉山 김석규 洪 海 里  나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샘새벽부터 솟아올라 넘쳐 내리는 소리 청청하거니물은 그칠 줄 모르고 흐르고 흘러때로는 폭포가 되고아이들을 만나면 분수가 되고먼 길 가는 젊은 나그네 목도 축이며머지않아 바다에 이르면갈매기 노랫소리로 수놓은시 바다[詩海]를 이루리라만 편의 시가 출렁이는망망대해 반짝이는 윤슬이여신선한 파돗소리 따라바닷고기들 춤사위 찬란하고하늘도 오색 구름을 피워시인에게 고맙다 고맙다 화답하누나.

시집 증정

시집 증정 洪 海 里  1969년애 나온 내 첫 시집 『투망도投網圖』정가 320원이었다요즘 보니 경매에 나온 그 책경매가가 30만 원이다 책을 소개한 글을 보면 '증정본'이라고 돼 있는데내가 시집을 드린 분이 바로 은사 김 시인교수님그 사이 50년 넘게 이리저리 굴러다니다이제 경매 사이트에까지 올라오게 되었나 보다 80년대 초 어느 해새 시집이 나와 동료교사에게 증정을 했더니학기말에 자리가 바뀌어 짐을 옮겨야 하는데내 시집이 휴지통에 처박혀 있었다 창피해서 몰래 꺼내 보니, 바로고릴라란 별명의 수학선생 고高가 그년이었다돼지에게 던져 줄 걸참 내가 눈이 삐었구나 했지. - 월간 《우리詩》 2024. 7월호.(제433호)

우연 한 장

우연 한 장 洪 海 里  "아저씨, 미아5동으로 가려면 어디로 가요?""미아5동으로 가야지요!"머리 허연 노파가 길을 묻고내가 답한다 우이동솔밭공원 옆 골목길에서길을 잃고 쩔쩔매고 있었다아내도 길을 못 찾고 이리저리 헤매다 떠났다몇 해 전 일이었다 지금은 어디에 자리 잡고 있는지아직도 여기저기 떠돌아 다니는지하늘을 망연히 올려다보니어느새 저녁 하늘이 나즈막이 펼쳐져 있다 그곳에서는부디 길을 잃고 갈팡질팡하는 일이 없기를,인생길이 막막한 미로라 하지만발길 가는 대로 가다 보면 끝이 있는 것인가.- 월간 《우리詩》 2024. 7월호.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역설 또는 미완의 완성 洪 海 里 1. 살날이 줄어들수록 하루는 그만큼 길어지네 갈 길은 멀고 할 일은 많은데 세상 사는 일 길고 짧은 일 그게 무엇인가 퍼져나갔던 꿈도 나이 들어 줄어들다, 끝내는 나 하나뿐 나 자신으로 끝나고 마네 2. 명작이라고? 걸작이라고? 세상에 걸작이 어디 있고, 명작이 어디 있는가? 그걸 만든 사람이 완성하지 못하고 손들고 버린 것일 뿐이지 만족해서 손 놓은 완성작일까 세상에 걸작은 없다 그것을 쓴 사람이나 그린 이가 살아 있다면 어찌 명작이고 걸작일 수 있겠는가 이미 쓰인 글, 그려진 작품에 붓을 대지 않는 이 시인인가? 화가인가? 하루가 너무 지루하게 긴데 살날은 얼마 남지 않았네. - 계간 『문학춘추』 2024. 여름호(제127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