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로 한로寒露 洪 海 里 지상의 가을이 익을 대로 익으면 가장 아름답고 깨끗한 풀잎마다 물빛 구슬이 맺힌다 우주는 신의 장난감 이슬 속에서 굴러간다 또르르또르르 투명한 하늘이 높이 걸리고 모두가 무거운 몸을 뉘인다. - 월간《춤》2001. 10월호.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춤 춤 소리는 춤을 싣고 춤은 소리를 타고 하늘을 날고 있네 춤추는 이여! 그대의 손끝에 우주가 있고 영원이 그대 손 안에 있어 우리를 숨 막히게 하네 그대의 몸짓이 언어를 희롱하고 있네 그대 몸짓 앞에서, 우리는 모두 눈을 감나니 우주가 빙그르르 도네 강물이 출렁이고 바람이 멎고 산이 솟구치고 ..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길고 쓸쓸한 하루 길고 쓸쓸한 하루 洪 海 里 맨몸으로 던져진 울음과 철모르고 부르던 노래와 날개가 돋아나던 황홀한 순간과 뜨거운 모래밭을 맨발로 걷던 절정과 별에서 별로 날아다니던 눈부신 비상 그리고 칼날과 송곳 위를 기던 아찔한 순례의 길 아아 한평생이란 묵묵히 걸어가는 길 위의 하루하루..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한가을 한가을 洪 海 里 내일 모레 한가위 때도 이제 깊을 대로 깊어 통! 통! 소리를 내며, 우주가 고무공처럼 굴러가고 있다 지금은 가볍고도 무거운 계절, 모든 살은 다디달고 뼈는 강철보다 단단하다 잘 익은 승객들을 가득 태우고 초고속열차가 다음 역을 향해 출발했다 미처 승차하지 못한 구..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몸 2 몸 · 2 洪 海 里 때 씻을 두 말의 물과 마음 닦을 비누 일곱 개의 지방과 글 쓸 연필 아홉 자루의 연鉛과 정신의 방 한 칸을 바를 석회와 불 밝힐 성냥개비 2,200개의 인燐과 방 소독할 DDT를 만들 유황과 뼈 흔들리지 않게 칠 못 한 개의 철鐵로 평생을 수리하며 사는, 무한 임대로 빌려 살고 ..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풀벌레 울음소리 풀벌레 울음소리 빨갛게 독이 오른 고추밭에서 풀벌레들이 울고 있다 저놈들도 독이 올라 빨갛게 울고 있다 뜨거운 노래는 땅에 묻는다는데 아직도 그리움이 남아 있는지 울음을 허공에 풀고 있다 돌아갈 길 못 찾아 등불 밝히고 손 없는 날 잡아 길 떠날까 서서히, 여름의 흔적이 지워지고 지상의 모..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꿈 2 꿈 2 가을이 깊어지는가 벌레소리 또르르또르르 소소하더니 벌써 소슬하니 말리고 있다 저녁이면 그믐달이 아쉬운 심사로 별 하나 데리고 나와 지상의 벌레소릴 접시에 주워 담고 있다 꽃들도 눈꼬리가 내려앉고 젖꼭지도 말라버렸다 흥건하던 물소리 잦아들고 메마른 바람만 들락이는 대지 지난 여..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가을 엽서 가을 엽서 洪 海 里 풀잎에 한 자 적어 벌레소리에 실어 보냅니다 난초 꽃대가 한 자나 솟았습니다 벌써 새끼들이 눈을 뜨는 소리, 향기로 들립니다 녀석들의 인사를 눈으로 듣고 밖에 나서면 그믐달이 접시처럼 떠 있습니다 누가 접시에 입을 대고 피리 부는 연습을 하고 있습니다 창백한..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흔적 흔적 창 앞 소나무 까치 한 마리 날아와 기둥서방처럼 앉아 있다 폭식하고 왔는지 나뭇가지에 부리를 닦고 이쪽저쪽을 번갈아 본다 방안을 빤히 들여다보는 저 눈 나도 맥 놓고 눈을 맞추자 마음 놓아 둔 곳 따로 있는지 훌쩍 날아가 버린다 날아가고 남은 자리 따뜻하다.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
몸 1 몸 1 사랑하라, 네 몸은 네 것이 아니다 네가 잠시 빌려 살고 있는 신神이 주인이신 집이다 너는 몸에 대해, 전혀 신경을 쓰지 마라 빌린 대로 그냥 쓰면 되느니, 네 것인 양하다 보면 병이 나는 법法, 계약 기간이 다하면 신의 소유물은 되돌려 줘야 할 것 아니냐 주인 없는 물건처럼 보지 마라 신경은 신.. 시집『푸른 느낌표!』2006 2006.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