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대야 열대야 洪 海 里 벽에 걸려 있는 시래기처럼 실외기室外機가 뜨겁게 울고 있는, 골목마다 널브러진 쓰레기같이 사내들이 헉헉대고 있는, 한여름 밤에 나는 이 불은 이불을 걷어차고 열 대야의 찬물로도 꺼지지 않는 화염지옥 내 다리 나의 다리 겹치는 것도 열나는 밤, 열대야! - 월간 《우리詩》 2023. 7월호.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6.08.20
바보친구 바보친구 洪 海 里 시 한 편 써 달라 하면 "알았어!" 글씨 한 점 부탁해도 "그럴께!" 그림 한 점 그려 달라 하면 "그래!" 술 한잔하자 해도 "좋아!" 하던, 그게 서우瑞雨였다, 내 친구! - 계간《다시올文學》 2020. 봄호 * 2015년 4월 17일 瑞雨(이무원 시인)는 저세상으로 갔다. 나보다 한 해 늦게 ..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6.06.07
<시> 꽃구름 / 洪海里 꽃구름 洪海里 오는 봄 가는 봄이 동시이니 안 그런 척 시치미 뗄 짬도 없다 결국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는 늘 제자리일 뿐. 피는 꽃 지는 꽃이 하나이니 우두망찰하지 마라 사약 사발 위에도 흰구름 흐르고 시간은 가면서 오니 늘 꽃구름.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6.05.17
해오라비난초 해오라비난초 洪 海 里 조카사위 간 날 너를 만났다 해오라비난초! 장례식장 신발마다 동서남북 제각각 갈 길을 향하고 있었다 영정 속에 갇혀 있는 저 생생한 사내 겨우 사십을 살고 가는 저 사내 가는 길이나 알까 한쪽에서는 벌써 불콰한 얼굴들이 소주잔에 빠져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고 옆에는 검은 치마 저고리들이 훌쩍이고 있었다 겨우 인생 초반을 살고 떠난 사내 조카사위! 하고 한 번 불러 보지도 못한 사내 아홉살과 여섯살은 잔칫집인 듯 문상객들 사이를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천진과 난만이 어디까지이고 언제까지일까. 세상에, 세상에, 무엇이 그리 급해 울울창창 사십에 이승을 버리고 가나 부모 앞서 가는 것을 참척慘慽이라 하니 얼마나 참혹한 일인가 누군들 오가는 것을 알 수 있으랴만 누군들 오가는 걸 막을 수 있겠..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3.07.03
<시> 안개 안개 洪 海 里 진부령을 넘으며 너를 만났다익을 대로 다 익은 농염한 너감출 것이 많은 여인네처럼설악산 비단치마 다 펼쳐서전신을 감고 정신을 잃게 하더니나를 백일몽 환자로 만들었다어디 숨어 있다 갑자기 나타나어느새 두 팔을 잡아 끌고산 위로 올라가고 있었다무봉천의無縫天衣가 다 벗겨지고 있었다. (1990)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3.04.27
<시> 새가 운다 새가 운다 洪 海 里 비둘기는 나라를 구하라! '구국求國, 구국!' 울어 대고. 법으로 다스려라! '법국法國, 법국!' 울어 쌓는 뻐꾸기. 나라를 일으켜 세워라! '부흥復興, 부흥!' 울음 우는 부엉이. 까마귀는 정신좀 차려라! '각각覺覺, 각각!' 울부짖는데, 새대가리라 욕하지 마라, 새만도 못한 ..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2.12.21
<시> 시 또는 시집 읽기 시 또는 시집 읽기 洪 海 里 무시로 날아오는 시집을 펴고 시를 읽다, 시집을 읽다 시는 보이지 않고 시집만 쌓여 간다 "가슴 속이 보이는 온 몸을 품고 제 자리에 가로선체 꼼짝도 안고있다 가랭이 가까히 낭떨어지 꺼꾸로 날으는 눈꼽 달고 있는 눈섭의 놈팽이 갑짜기 갈려고 하는 데 담..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2.10.25
<시> 무드와 누드 무드와 누드 洪 海 里 무드의 방문을 열면 누드가 보인다. 방문을 닫으면 무드가 죽고, 방문을 열면 누드가 시든다. 문을 닫으면 안이 환하고 문을 열면 밖이 눈부시다.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2.10.11
<시> 어미새 어미새 洪 海 里 남의 집 맡긴 새끼 잘 크고 있는지 자식이 그립다고 우는 뻐꾸기. 봄날은 속절없다 고향 가자고 나는 연습하라고 우는 어미새. (2005. 6.) 『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2011.05.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