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選集『洪海里는 어디 있는가』(2019) 122

자벌레

자벌레   洪 海 里  몸으로 산을 만들었다허물고, 다시 쌓았다무너뜨린다. 그것이 온몸으로 세상을 재는한평생의 길, 山은 몸속에 있는 무등無等의 산이다.     ◆시 읽기◆ 자벌레는 자벌레나방의 애벌레이다. 중간 쌍의 다리가 없어 가늘고 긴 원통형 몸으로 앞부분을 쭉 뻗은 후 꽁무니를 머리 쪽으로 당겨 올리기를 반복하며 조금씩 움직인다. 제 몸의 길이를 다하는 걸음 걸음이 마치 자로 길이를 재는 듯한 모습이기도 하고, 산을 만들었다 허물고 쌓았다 무너뜨리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모든 삶은 움직임이다. 살기 위해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 움직여야 한다.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어떤 절명의 한순간도 건너 뛸 수 없는 것이 삶이다. 자로 재면 잴수록 질곡의 수렁 속에 빠지는 것임을 알면..

능소화

능소화 洪 海 里 언제 바르게 살아 본 적 있었던가 평생 사내에게 빌붙어 살면서도 빌어먹을 년! 그래도 그거 하나는 세어서 밤낮없이 그 짓거리로 세월을 낚다 진이 다 빠져 축 늘어져서도 단내를 풍기며 흔들리고 있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준 사내에게 너 아니면 못 산다고 목을 옥죄고 바람에 감창甘唱소리 헐떡헐떡 흘리는 초록치마 능소화 저년 갑작스런 발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花들짝, 붉은 혀 빼물고 늘어져 있네. ― 『황금감옥』(2008, 우리글) ****************************** * 시는 마약이다! 시는 ‘중독성’ 마약이다. 한 번 중독되면 벗어나기 힘들다. 아니 마약 이상이다. 담배 끊는 사람은 간혹 보이지만 시 끊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마음 빼앗기고 몸도” 주었다는 것을 그렇..

시월

시월 洪 海 里가을 깊은 시월이면싸리꽃 꽃자리도자질자질 잦아든 때,하늘에선 가야금 퉁기는 소리팽팽한 긴장 속에끊어질 듯 끊어질 듯,금빛 은빛으로 빛나는머언 만릿길을마른 발로 가고 있는 사람보인다.물푸레나무 우듬지까치 한 마리투명한 심연으로, 냉큼,뛰어들지 못하고,온 세상이 빛과 소리에 취해원형의 전설과 추억을 안고추락,추락하고 있다.  * 투명한 보랏빛 구슬 자잘자잘 깨어진 사금파리. 여름내 반짝이던 싸리꽃 자지러든 자리 갈대꽃 피어 피어 은빛살 출렁이고. 금방이라도 끊길 듯 팽팽한 하늘 투명의 심연. 비스듬히 내리꽂히는 은빛 금빛 햇살 만릿길 떠나야 할 새들 하늘 길 긋는데. 우듬지 위태롭게 앉아 이별과 조락 예감하는 투명하고 씁쓸한 심사. 시월 한가운데 되풀이되는 가을 원형의 전설.    - 이경철(..

호박

호박 洪 海 里 한 자리에 앉아 폭삭 늙었다 한때는 푸른 기운으로 이리저리 손 흔들며 죽죽 뻗어나갔지 얼마나 헤맸던가! 방방한 엉덩이 숨겨놓고 활개를 쳤지 때로는 오르지 못할 나무에 매달려 버둥거리기도 했지 사람이 눈멀고 반하는 것도 한때 꽃피던 시절 꺽정이 같은 떠돌이 사내 만나 천둥치고 벼락치는 날갯짓 소리에 그만 혼이 나갔겠다 치맛자락 뒤집어쓰고 벌벌 떨었지 숱한 자식들 품고 살다 보니 한평생이 별것 아니더라고 구르는 돌멩이처럼 떠돌던 빈털털이 돌이 아범 돌아와 하늘만 쳐다보며 한숨을 뱉고 있다 곱게 늙은 할머니 한 분 돌담 위에 앉아 계시다. - 시집『황금감옥』(2008, 우리글) * 시감상 밭에, 산길에, 아파트 화단에, 노란 호박꽃이 피었다. 중간중간 애호박도 보이고 늙은 호박도 보인다. 가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