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66

처녀치마 / 천지일보 2021.04.29. 윤석산 시인

[마음이 머무는 詩] 처녀치마 - 홍해리 천지일보 (newscj@newscj.com) 승인 2021.04.29. 처녀치마 洪 海 里(1942 ~ ) 철쭉꽃 날개 날아오르는 날 은빛 햇살은 오리나무 사이사이 나른, 하게 절로 풀어져 내리고, 은자나 된 듯 치마를 펼쳐 놓고 과거처럼 앉아 있는 처녀치마 네 속으로 한없이 걸어 들어가면 몸 안에 천의 강 흐르고 있을까 그리움으로 꽃대 하나 세워 놓고 구름집의 별들과 교신하고 있는 너의 침묵과 천근 고요를 본다. [시평] 처녀치마는 식물의 이름이다. 처녀치마는 지난해에 돋아난 잎이 시들지 않고 무성한 채로 추운 겨울을 견뎌낸다. 겨울의 잔설이 녹아내릴 때쯤 겨울을 견뎌낸 잎 가운데에서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한다. 3월 말경이면 꽃대가 완연히 올라와 4월에서 5월까..

이광수 시집 『산골 집값』 表辭

이광수 시집 『산골 집값』 表辭 “시다운 시 한 편 쓰는 게 오랜 꿈이다”라고 자서에서 자신의 뜻을 드러내 보이고 있으나 이광수 시인은 이미 많은 것을 이루어 냈음을 시편들을 읽으면서 확인할 수 있다. “호젓한 숲길에 감춰둔 보물창고”를 갖추고 있는 산골 집(시집)이라면 수십 억, 몇 백 억 하는 강남의 성채가 부러울 리 없다. 이 시인은 청빈을 자락하는 바른 삶에서 자연의 협주가 주는 지혜를 공짜로 얻어 시로 승화시키고 있으니 이미 시복을 듬뿍 타고났다. 시를 쉽게 쓰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알고 난 지금부터도 이제까지의 작품에서 보여준 간결성, 투명한 이미지, 짧은 경구 같은 위트와 유머, 우리말의 소박한 운용과 같은 요소를 앞으로의 작품 첨찬 과정에서도 마음껏 살리시기 바란다. “피기 전 다..

가을 들녘에 서서

[한국 현대시, 한시로 만나다] 가을 들녘에 서서, 홍해리 출처 한국일보 : https://www.hankyung.com/thepen/article/113869 가을 들녘에 서서 洪 海 里 눈멀면 아름답지 않은 것 없고 귀먹으면 황홀치 않은 소리 있으랴 마음 버리면 모든 것이 가득하니 다 주어버리고 텅 빈 들녘에 서면 눈물겨운 마음자리도 스스로 빛이 나네. [태헌의 한역] 立於秋野(입어추야) 眼盲無物不佳麗(안맹무물불가려) 耳聾無聲不恍恍(이롱무성불황황) 棄心一切皆盈滿(기심일체개영만) 盡授於人立虛壙(진수어인립허광) 欲淚心地亦(욕루심지역) 自然增輝光(자연증휘광) [주석] * 立(입) : 서다. / 於(어) : ~에. 처소를 나타내는 개사(介詞). / 秋野(추야) : 가을 들녘. 眼盲(안맹) : 눈이 멀다. /..

민문자 시집 『금혼식』 表辭

민문자 시집 『금혼식』 表辭 이번에 펴낸 소정의 시집 속에는 그의 한평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다. 바로 그가 함께하고 있는, 또는 함께했던 가족과 친척, 스승, 선배, 친구들, 그리고 이웃들의 삶이 사랑을 바탕 으로 따뜻하게 그려져 있다. 특히 얼마 전에 작고하신 어머니에 대한 글과 희수에 맞이한 금혼식에 대한 글이 담담하게 그러면서도 자랑스럽게 펼쳐져 있어 압권이다. 화려한 수사로 화장을 하지 않은 글로 진솔하게 그려낸 민낯의 행적이 잔잔한 울림을 주어 우리는 쉽게 읽고 공감하게 되는 장점을 이 시집은 품고 있어 따뜻하다. - 洪海里 (시인).

난초 / 정형무(시인)

난초 정형무(시인) 매란국죽 중에서 매화, 난초, 국화는 그윽한 향기가 제각각 일품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려말 무렵부터 란을 재배하기도 하고 사군자 중 하나로 묵란을 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여성의 이름에도 ‘란蘭’이 들어가면 예쁩니다. 난설헌蘭雪軒은 말할 것도 없고, 제 경우에도 윤동주의 ‘패.경.옥’처럼 ‘란’과 함께 떠오르는 이름이 몇 있습니다. 신석정 시인도 그랬나 봅니다. 난蘭이와 나는 산에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밤나무 소나무 참나무 느티나무 다문다문 선 사이사이로 바다는 하늘보다 푸르렀다. 난蘭이와 나는 작은 짐승처럼 앉아서 바다를 바라다보는 것이 좋았다. 짐승같이 말없이 앉아서 바다같이 바라다보는 것은 기쁜 일이었다. (‘작은 짐승’ 중에서) 기억을 잃어가는 병상의 아내에게 바치..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 홍인우(시인)

움직이는 것은 바람으로 홍 인 우(시인) 시인께서 서명을 마치고 건네주시며 말씀하셨다. 이 시집 읽고 가장 마음에 닿는 거 한 편만 이야기해 줘요. 작고 낮은 음성이었다. 돌아오는 전철에서 시집을 펴들었다. 평소 책 읽는 습관대로, 다시 읽고 싶은 페이지는 위에서, 필사하고 싶은 부분은 아래에서 삼각으로 접으며 읽다가 어느 페이지에서 가슴 이 쿵 떨어졌다. 몇 번 몇 번을 다시 읽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마 창동역이었지 싶다. 너를 향해 열린 빗장 지르지 못해 부처도 절도 없는 귀먹은 산속에서 꽃초롱 밝혀 걸고 금강경을 파노니 내 가슴속 눈먼 쇠북 울릴 때까지. 홍해리 시인의 시 「금강초롱」 부분이다. 한 행을 한 연으로 삼았는지 행과 행 사이가 넓어 바람이 많이 드나 든다. 드나..

섭囁 -도란도란 / 洪海里 / 골프타임즈 2020. 5. 6. 정옥임

골프타임즈 2020. 05. 06. [정옥임의 시詩산책] 섭囁 - 도란도란 洪 海 里 술 마실 때 시끄럽게 굴지 말라고 술 마시고 야비다리하지 말라고 '섭囁'은 주도酒道를 이르는 도주道酒, 술의 길을 가리키는 이정표, 술의 멋을 가르치는 훈장이거라 술 마셨다고 함부로덤부로 굴지 마라 두런두런대며 하동지동하지 말거라 입이 셋이고 귀가 하나라면 가볍고 나직하니 어찌 정다울 수 있으며 그 이야기인들 어이 귀에 들리겠느냐 입 하나에 귀가 셋이니 얼마나 좋으냐! '섭'은 토리土理 좋은 남도땅이 낳은 알[土卵]로 정성 다해 빚은 술이니 하늘 기운과 땅의 피가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지 않았느냐 '도란도란'은 투명한 액체의 불 바로 자연이 낳은 용암이다 눈으로 마시면서 마음으로 먼저 취하거라 지딱지딱 마셔 취할 것이 아..

아내의 새 / 洪海里 / 경상매일신문

경상매일신문 2019. 06. 03. 아내의 새 洪 海 里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 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부친다 기력이 쇠잔한 새는 조롱조롱 세장 안을 서성일 따름 붉게 지는 노을을 울고 있다 담방담방 물 위를 뛰어가는 돌처럼 온몸으로 물수제비 뜨듯 신선한 아침을 노래하던 새는 겨울밤 깊은 잠을 비단실로 깁고 있다 노래도 지우고 울음도 잠재울 서서한 눈발이 한 생生을 휘갑치고 있다. 새장 안에 갇혀 사는 삶. 같은 조롱 안에서 아내를 바라보는 남편은 아내가 측은하기만 하다. 좁은 공간에서, 어쩔 수 없어 견디며 힘..

어린아이 - 치매행 致梅行 · 4 / 경상매일신문

어린아이 - 치매행 · 4 / 홍해리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어린아이가 된 아내의 이야기. 아직은 젊은 아내가 치매라는 병에 걸렸다. 생각할수록 어이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왜 하필 이런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을까. 시인은 무던히도 가슴을 쳤을 것이다. 아내를 쳐다볼 때마다 초롱초롱하던 사람이 어쩌다가 저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