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65

산책 / 박모니카(수필가), 2021.10.09. 경상매일신문

산책 洪 海 里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동음이의어同音異意語로 이렇게 멋진 시가 탄생한다. 산책散策은 천천히 걸으며 휴식을 취하는 일인데 그 일이 곧 살아 있는 책冊이 되어 무언가를 배우는 학습장이 된다. 자연自然은 우리들의 배움터다. 그 배움터에 살아 있는 책冊(산 책)으로 본 것이다. 사유의 깊이가 바탕이 된 시를 읽으며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간다. 우리들이 흔히 잡초라고 보는 황새냉이, 털별꽃아재비, 그령, 방동사니와 같은 풀들에게서 그들의 질긴 생명럭을 배운다. 방..

아내는 부자 / 감상 · 그림 : 전선용(시인)

아내는 부자 洪 海 里 나는 평생 비운다면서도 비우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버린다 버린다 하면서도 버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다 내려놓자 하면서도 그러지 못했습니다 버린다 비운다는 말 한마디 없이 내려놓는다는 말도 없이 아내는 다 버리고 비웠습니다 다 내려놓고 가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부자가 되었습니다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평안합니다 천하태평입니다 먹는 것도 입는 것도 걱정이 없습니다 집 걱정 자식 걱정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거칠 것이 없는 아내는 천하제일의 부자입니다. #홍해리_시인의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중에서 「아내는 부자」 (놀북. 2021) 살면서 비우고 살아야 한다는 말을 우리는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많이 듣고 삽니다. 머리는 알고 있는데 도무지 실천이 어려운 비워내기는 결국 어떤 어려운 ..

정형무 시집 表辭

表辭 정형무 시집 『닭의장풀은 남보라 물봉선은 붉은 보라』 정형무의 시는 외롭고 슬퍼서 순수하고, 순수해서 슬프고 외롭다. 재미있는 글도 읽지 않는 시대에 재미없는 시를 쓴다면 누가 읽겠는가. 시인은 한 편의 시를 낳기 위해 최선을 다해 먹잇감을 잡는 사바나의 맹수가 된다. 시는 도자기에 아무렇게나 그려낸 지두문指頭紋이 아니다. 정형무의 시는 슬픔, 외로움, 좌절, 죽음, 절망에 대한 인식이 순수하고 따뜻한 정조로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 짜여져 있어 물을 마셔도 목이 마른 세상에 생수 역할을 충분히 해내리라 믿는다.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 유형 무형의 수많은 영향을 받아 세상에 나온 그의 시가 독자들의 가슴 골짜기에 아름다운 메아리를 선사하길 바란다. 시 · 청 · 후각의 이미지가 재미있고 맛깔스럽게..

산책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홍해리의 '산책' 전문 스크린도어 앞에서 이 시를 접할 때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시는 시가 갖춰야 할 쾌락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을 모두 갖췄다. '산책'이라는 말에서 '돈을 주고 산 책',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산 책'을 떠올리며 교묘한 언어유희를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쾌락적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아울러 산책을 '자연경'이라는 경전을 읽는 행위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며 '산책'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어린아이 - 치매행 · 4

어린아이 -치매행·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2015) -------------------------------------------------------------------------------------------- 월간 『우리詩』를 발행하고 있는..

불통 / 홍해리 : 道隱 정진희(시인)

불통 / 홍해리 이번 시집 제목이 무엇입니까? ‘『비밀』’입니다. 시집 제목이 무엇이냐구요? ‘『비밀』’이라구요. 제목이 뭐냐구? ‘비밀’이라구. 젠장맞을, 제목이 뭐냐니까? 나 원 참, ‘비밀’이라니까. - 출처 : 『독종』 홍해리 시집, (북인. 2012. 시를 읽으면서 포복절도를 하니 아내와 딸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홍해리 시인님의 시집 을 출간하면서 출판사 담당자와 얽힌 얘기같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븐날, 시집간 딸 내외가 먹음직한 케이크와 맛있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찾아왔다. 출출하고 심심한 긴 밤에 웬 기쁨인가? 케이크를 자르고, 와인 한 잔을 마시니 ‘크리스마스 하이(Christmas high'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웃음을 멈출지 모르는 날보고, 아내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詩壽軒 풍경 / 여국현(시인)

《우리詩》 편집회의 : 2021. 8. 12. 시수헌 벽에 걸린 두 분 선생님의 시 오늘 더 크고 또렷하게 보인다 두 분처럼. 단단하고 힘 센 시 강력하고 기개 넘치는 시 현란함으로 펄펄 나는 시 현학으로 갈짓자 걷는 시 반짝이 감성으로 유혹하는 시 우울한 속 상처로 비틀거리는 시 쓰는 이도 모를 글자들이 카드집만 짓는 시 사람 따로 시 따로인 시인들과 시 그 속에서 빛난다 시의 주인과 함께 말없이 익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시 - 글과 사진 : 여국현 시인. * 홍해리의 「가을 들녘에 서서」

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⑭ 홍해리, 마음이 지워지다

2021.07.31. 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⑭ 홍해리, 마음이 지워지다 손현숙 시인 홍해리 시인 치매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시인과 시인의 대화 홍해리의 시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를 읽었다 : 홍해리 시인은 우이동에서 오랫동안 묵묵하게 시를 살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해서 현대시의 사조에는 누구보다도 밝았..

치매행致梅行 / 홍해리洪海里​

치매행致梅行 / 홍해리 ​ "밤낮없이 두통으로 고생하는 너, 서러워서 나는 못 보네" - 「정 – 아내에게」 부분. "이때가 ‘致梅行’의 시작이었다. 한일병원, 삼성병원, 서울대학병원, 고려대학병원을 거쳐 다시 한일병원으로 먼 길을 돌아 돌아 집으로 왔다" - 「아내여 아내여」 부분 (치매행 276) ​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

가을 하늘

가을 하늘 洪 海 里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 감상 떠가는 구름으로 족해 가을 하늘에 걸린 시 전생에서 이생까지 날아왔으니 당신과 나의 인연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잇는 시작詩作 나는 이제 당신이 떠난 길 더듬어 저녁이 들어올 때까지 시를 들이는 것 나는 이제 어쩔 도리 없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집을 또 한 채 짓고 옆자리를 비우네 시를 사는 것이 어쩌면 알맞은 고백과 알맞은 침묵이라 한 칸 한 칸 건너는 시의 행처럼 말하고 또 한 발자국 행간의 말없는 눈짓을 바라나 원대로 되지 않아 마음은 당신의 길 자꾸 올려다보네 저렇게 맑은 하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