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 ·평론·시감상 553

산책

"산책은 산 책이다/ 돈을 주고 산 책이 아니라/ 살아있는 책이다/ 발이 읽고/ 눈으로 듣고/ 귀로 봐도 책하지 않는 책/ 책이라면 학을 떼는 사람도/ 산책을 하며 산 책을 펼친다/ 느릿느릿,/ 사색으로 가는 깊은 길을 따라/ 자연경(自然經)을 읽는다/ 한 발 한 발." - 홍해리의 '산책' 전문 스크린도어 앞에서 이 시를 접할 때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꼈다. 시는 시가 갖춰야 할 쾌락적 기능과 교훈적 기능을 모두 갖췄다. '산책'이라는 말에서 '돈을 주고 산 책',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산 책'을 떠올리며 교묘한 언어유희를 하며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한다. 쾌락적 기능을 수행한 것이다. 아울러 산책을 '자연경'이라는 경전을 읽는 행위로 승화시키며 살아가며 '산책'뿐만 아니라 '책'을 통해 철학적 사고를..

어린아이 - 치매행 · 4

어린아이 -치매행·4 洪 海 里 아내는 어린애가 되었습니다 내가 밖에 나갈라치면 어느새 먼저 문밖에 나가 있습니다 억지로 떼어놓고 외출을 하면 왜 안 와? 언제 와? 늘 똑같은 두 마디 전화기 안에서 계속 울고 있습니다 내가 자기를 낳은 어미도 아니고 아버지도 아닌데 한평생 살 비벼 새끼 낳고 기른 죄 많은 지아비라서 나는 나이 든 아기의 아빠가 되었습니다 오늘도 내 사랑하는 아가는 내게 매달려 한마디 말은 없지만 그냥, 그냥, 말문을 닫고 웃기만 합니다. - 홍해리 시집, 『치매행致梅行』(황금마루,2015) -------------------------------------------------------------------------------------------- 월간 『우리詩』를 발행하고 있는..

불통 / 홍해리 : 道隱 정진희(시인)

불통 / 홍해리 이번 시집 제목이 무엇입니까? ‘『비밀』’입니다. 시집 제목이 무엇이냐구요? ‘『비밀』’이라구요. 제목이 뭐냐구? ‘비밀’이라구. 젠장맞을, 제목이 뭐냐니까? 나 원 참, ‘비밀’이라니까. - 출처 : 『독종』 홍해리 시집, (북인. 2012. 시를 읽으면서 포복절도를 하니 아내와 딸이 의아하게 생각한다. 아마도 홍해리 시인님의 시집 을 출간하면서 출판사 담당자와 얽힌 얘기같다. 12월 24일 크리스마스 이븐날, 시집간 딸 내외가 먹음직한 케이크와 맛있는 와인 한 병을 들고 찾아왔다. 출출하고 심심한 긴 밤에 웬 기쁨인가? 케이크를 자르고, 와인 한 잔을 마시니 ‘크리스마스 하이(Christmas high'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웃음을 멈출지 모르는 날보고, 아내는 아직도 ‘크리스마스..

詩壽軒 풍경 / 여국현(시인)

《우리詩》 편집회의 : 2021. 8. 12. 시수헌 벽에 걸린 두 분 선생님의 시 오늘 더 크고 또렷하게 보인다 두 분처럼. 단단하고 힘 센 시 강력하고 기개 넘치는 시 현란함으로 펄펄 나는 시 현학으로 갈짓자 걷는 시 반짝이 감성으로 유혹하는 시 우울한 속 상처로 비틀거리는 시 쓰는 이도 모를 글자들이 카드집만 짓는 시 사람 따로 시 따로인 시인들과 시 그 속에서 빛난다 시의 주인과 함께 말없이 익어온 시간이 고스란히 담긴 시 - 글과 사진 : 여국현 시인. * 홍해리의 「가을 들녘에 서서」

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⑭ 홍해리, 마음이 지워지다

2021.07.31. 손현숙 시인이 여는 '詩의 아고라'⑭ 홍해리, 마음이 지워지다 손현숙 시인 홍해리 시인 치매 홍해리 이별은 연습을 해도 여전히 아프다 장애물 경주를 하듯 아내는 치매 계단을 껑충껑충 건너뛰었다 “네가 치매를 알아?” “네 아내가, 네 남편이, 네 어머니가, 네 아버지가 너를 몰라본다면!” 의지가지없는 낙엽처럼 조붓한 방에 홀로 누워만 있는 아내 문을 박차고 막무가내 나가려들 때는 얼마나 막막했던가 울어서 될 일 하나 없는데 왜 날마다 속울음을 울어야 하나 연습을 하는 이별도 여전히 아프다. 시인과 시인의 대화 홍해리의 시집 《마음이 지워지다》(놀북, 2021)를 읽었다 : 홍해리 시인은 우이동에서 오랫동안 묵묵하게 시를 살고 있다. 영문학을 전공해서 현대시의 사조에는 누구보다도 밝았..

치매행致梅行 / 홍해리洪海里​

치매행致梅行 / 홍해리 ​ "밤낮없이 두통으로 고생하는 너, 서러워서 나는 못 보네" - 「정 – 아내에게」 부분. "이때가 ‘致梅行’의 시작이었다. 한일병원, 삼성병원, 서울대학병원, 고려대학병원을 거쳐 다시 한일병원으로 먼 길을 돌아 돌아 집으로 왔다" - 「아내여 아내여」 부분 (치매행 276) ​ "아내가 문을 나섭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왜 가는지도 모른 채/ 그냥 집을 나섭니다/ 눈은 내리는데/ 하얗게 내려 길을 지우는데/ 지팡이도 없이 밖으로 나갑니다/ 닫고 걸어 잠그던 문 다 열어 놓고/ 매듭과 고삐도 다 풀어버리고/ 바람처럼 강물처럼 구름처럼/ 텅 빈 들판처럼 혈혈孑孑히......, / 굽이굽이 한평생/ 얼마나 거친 길이었던가/ 눈멀어 살아온 세상 / 얼마나 곱고 즐거웠던지 /귀먹었던 것..

가을 하늘

가을 하늘 洪 海 里 아득하다는 거리는 차라리 없는 것 덧없다는 말은 오히려 애틋한 것 우리의 인연은 전생서 이생까지 아득한 거리는 이승서 저승까지 아내여, 지금 가는 길이 어디리요 하늘은 맑은데 오슬오슬 춥습니다. * 감상 떠가는 구름으로 족해 가을 하늘에 걸린 시 전생에서 이생까지 날아왔으니 당신과 나의 인연은 이승에서 저승으로 잇는 시작詩作 나는 이제 당신이 떠난 길 더듬어 저녁이 들어올 때까지 시를 들이는 것 나는 이제 어쩔 도리 없이 초저녁부터 새벽까지 집을 또 한 채 짓고 옆자리를 비우네 시를 사는 것이 어쩌면 알맞은 고백과 알맞은 침묵이라 한 칸 한 칸 건너는 시의 행처럼 말하고 또 한 발자국 행간의 말없는 눈짓을 바라나 원대로 되지 않아 마음은 당신의 길 자꾸 올려다보네 저렇게 맑은 하늘 ..

수의에는 왜 주머니가 없는가

수의에는 왜 주머니가 없는가 洪 海 里 뼈는 바위가 되어 산으로 솟고 살은 흙으로 돌아가 논밭이 되리라 피는 물이 되어서 강과 바다를 이루고 숨은 바람이 되어 푸나무들 숨통 틔우고 넋은 비잠주복의 생명이 되어 뛰어놀리라 주머니는커녕 수의인들 무슨 필요가 있으랴! * 감상 떠나는 날에는 돌아보지 않기로 내 뼈 한 조각에 내 살 한 점에 내 숨 한 모금에는 사랑한 기억만 남기노라 떠나는 날에는 붙잡지 않기로 하늘에 나는 새와 헤엄치는 물고기와 광야를 달리는 짐승과 은밀하게 기어다니는 벌레들에게 내 시를 돌려주노라 누군가 불을 켜는 저녁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가고 붙잡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어디선가 내 시를 읽는 이 당신이 남긴 시를 읽는 이 또 시인의 집을 짓고 살고 - 금강하구사람 http://blog..

홍해리 시인의 아내에 대한 3편의 절창絶唱

홍해리 시인의 아내에 대한 3편의 절창絶唱 17. 20. 21:00 최 길 호(목사) 1. 2021년 7월 10일 홍해리 시인의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가 출간되었다. 이번 시선집은 홍 시인의 관여없이 출판사에서 직접 계획한 것이다. 시인의 아내는 오랫동안 치매를 앓다가 지난해 11월에 세상을 떠났다. 그 동안 아내에 대해 썼던 작품에서 선정한 총 119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 시선집이 치매 가정에 구급차 역할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하고 작품 숫자를 119편으로 정했다고 한다. 시집의 제목이 [마음이 지워지다]이다. 이유가 무엇일까? 치매는 마음이 지워지는 병이다. 아내가 그 곁을 떠나간 이후 그의 마음을 지키고 있었던 정서들도 하나 둘씩 지워졌을 것이다. 2. 그동안 시인이 치매를 앓고 있던 아내를 ..

洪海里 시선집『마음이 지워지다』/ 정일남(시인)

홍해리 시선집 『마음이 지워지다』를 읽고 정일남(시인) 치매를 앓은 마거릿 대처 전 영국수상은 치매에 걸린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리라. 딸 캐럴이 어머니 투병기를 신문에 연재하면서 밝혀졌다. 8년 동안 치매를 앓은 대쳐는 5년 후 87 세로 타계했다. 어느 시인은 치매를 “영혼의 정전”이라 했고 홍해리 시인은 “치매癡呆는 치매致梅에 이르는 길”이라 했다. 레이건 미국 대통령은 대처와 달리 담화문을 통해 발병 사실을 알렸다. “나는 인생의 황혼을 위한 여행을 시작하지만 미국의 미래는 언제나 찬란할 것”이라고 축복을 곁들였다.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죽음을 맞기 위해서도 치료약은 개발돼야 한다. 홍해리 시인이 그동안 발행한 치매시집에서 작품을 선별해 『마음이 지워지다』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