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2016 69

<시> 말복末伏

말복末伏 洪 海 里 세상이 문드러져 문둥이 같다 햇볕 뒤꿈치가 많이 닳았다 벼가 독이 올라 자궁이 퍼렇다 매미 울음통도 거덜이 났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 폭염으로 모두 지쳐 가는 한여름에도 연꽃은 그 우아한 자태를 드러냅니다. 진흙에서 자랐지만 진흙에 물들지 않는다는 이제염오(離諸染汚), 둥글고 원만해 바라보면 마음이 절로 온화해지고 즐거워진다는 면상희이(面相喜怡)…. 불교에는 연꽃을 칭송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코로나19와 지구온난화까지, 인간의 많은 과오에도 활짝 핀 연꽃이 ‘지금도 늦지 않았다’고, 고치면 된다고 위로하는 듯합니다. ― 장승윤 기자 (8월 어느 날 서울 조계사에서/동아일보 2021.08.11.)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 옥계 바닷가에서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 옥계 바닷가에서 洪 海 里 바다가 파도로 북을 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이 두 쪽의 입술이었다 밤이 되자 별들이 하나, 둘씩 반짝이고 있었다 떠들썩하던 천년 소나무들이 바다를 읽고 있었다 달빛 밝은 우주의 그늘에서 두 쪽의 입술이 잠시 지상을 밝혀 주었다.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 혼자서 우는 것은 곡哭뿐이다 '哭'에는 개 머리 위에 두 개의 입이 있다 이쪽은 저쪽이 있어서 운다 쪽쪽 소리를 내는 것은 존재를 확인하는 일 쪽은 색을 낼 때만 쓰는 것이 아니다. - 시집 『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

<시> 겨울밤의 꿈

겨울밤의 꿈 洪 海 里 긴긴 겨울밤 깊디깊은 잠 깰 줄 모르는 죽음 속에서 칠흑으로 칠흑으로 빠져드는 꿈 가슴속 시냇물 꽝꽝 얼어서 유리창에 성에꽃 칼로 피어도 입김에 지는 눈물 흘러내리듯 단단한 겨울밤은 지새고 마는가 부리 얼까 죽지에 머리 묻은 새. (2005) - 시집『바람도 구멍이 있어야 운다』(도서출판 움,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