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405

가을 한 점

가을 한 점 洪 海 里 따끈따끈하고 바삭바삭한 햇볕이 나락에 코를 꿰어 있어도 투명하다 혼인 비행을 하고 있는 고추잠자리가 푸른 하늘을 업고 빙빙 돌고 있다 여름 내내 새끼들로 시끄럽던 새집들은 이미 헌집이 되어 텅텅 비었다 너른 들판이 열매들로 가슴이 탱탱하니 더 바랄 것 하나 없이 가득하다. - 월간 《우리詩》(2020. 11월호). * 가을 한 잔 커피향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순간,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나는 순간, 네 생각이 나는 이 순간이 바로 가을. ―서울 종로구 삼청동에서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동아일보 2020. 10. 10.)

주부의 힘

주부의 힘 洪 海 里  주부가 무너지니집 안과 집안에 바로 서는 게 없다여기저기 여기 저기 여 기 저 기바람은 새고 먼지만 쌓이고 있다. 가족이 스러지고일가 친척들이 사라지고이웃과 친구들이 멀어지고사회활동이 허물어지고 드디어 천박한 민주주의알량한 나라쥐도 새도 모르는 새바닥에 떨어져 바닥나고 있다 세상이 불타고 있다.  * 2020. 09. 17. 강북종합시장 골목길을 걷고 있는 임보 시인과 필자.

한 톨의 쌀

한 톨의 쌀 洪 海 里 쌀 한 톨이 내게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이들의 손을 빌렸을까 밥 한 그릇 앞에 절로 머리가 숙여지네 쌀[米]이란 말 속에 들어 있는 여든여덟이란 숫자 그게 어찌 별것 아니겠는가 아버지 할아버지의 눈물과 땀 논두렁에서 막걸리 한잔에 날리던 한숨은 바람으로 날아가고 모 심을 때 들리던 뻐꾸기 소리 맞춰 못줄을 넘기곤 했지 벼 벨 때면 메뚜기도 다 자랐었지. 한평생 씹어삼킨 쌀알이 몇이랴 몇 십 백 천 만 십만 백만 그리고 또 얼마일 것인가 새벽녘 해장국집에서 한낮 백반집에서 파장머리 국밥집에서 먹은 밥 밥 밥 밥 밥 밥 이제 땅은 눈보라 북풍 한설 속에 긴 잠을 자고 다시 농사를 시작하리라 밥심은 벼꽃이 이룬 쌀의 힘이다. - 월간 《우리詩》(2020. 11월호).

탓하는 세상

탓하는 세상 洪 海 里 어찌 탓이란 탓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만 있는 것인가 "내 탓이오, 내 탓!"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말은 어디로 사라지고 "네 탓이야, 네 탓!" '이것도 네 탓, 저것도 네 탓, 그것도 네 탓!' 하는 소리만 빈 깡통, 빈 수레처럼 요란한 것인가 그릇된 원인도 잘못된 까닭도 다 내 탓 원망과 핑계가 모두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로구나 그렇구나 세상은 다 내 탓이로구나. - 월간 《우리詩》(2020. 11월호).

모탕과 모루

모탕과 모루 洪 海 里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 놓은 나무토막인 모탕은 장작을 낳는 어미요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인 모루는 연장을 낳는 어미이니 모탕과 모루의 '모'자는 '母'가 맞다 '탕'은 무엇이고 '루'는 무엇인가 금고 '탕帑'을 母에 이어 母帑이라 하면 불을 땔 장작을 낳는 모탕이 되고 母에 진을 뜻하는 '루壘'를 붙여 毛壘가 되면 도구와 연장을 낳는 어미가 되지 않겠는가! * 때로는 이렇게 우리말을 한자로 만들어 보는 재미도 시인이 즐기는 놀이가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