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시간의 발자국』(미간) 408

탓하는 세상

탓하는 세상 洪 海 里 어찌 탓이란 탓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만 있는 것인가 "내 탓이오, 내 탓!"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말은 어디로 사라지고 "네 탓이야, 네 탓!" '이것도 네 탓, 저것도 네 탓, 그것도 네 탓!' 하는 소리만 빈 깡통, 빈 수레처럼 요란한 것인가 그릇된 원인도 잘못된 까닭도 다 내 탓 원망과 핑계가 모두 네 탓이 아닌 내 탓이로구나 그렇구나 세상은 다 내 탓이로구나. - 월간 《우리詩》(2020. 11월호).

모탕과 모루

모탕과 모루 洪 海 里 나무를 패거나 자를 때 밑에 받쳐 놓은 나무토막인 모탕은 장작을 낳는 어미요 달군 쇠를 올려놓고 두드릴 때 받침으로 쓰는 쇳덩이인 모루는 연장을 낳는 어미이니 모탕과 모루의 '모'자는 '母'가 맞다 '탕'은 무엇이고 '루'는 무엇인가 금고 '탕帑'을 母에 이어 母帑이라 하면 불을 땔 장작을 낳는 모탕이 되고 母에 진을 뜻하는 '루壘'를 붙여 毛壘가 되면 도구와 연장을 낳는 어미가 되지 않겠는가! * 때로는 이렇게 우리말을 한자로 만들어 보는 재미도 시인이 즐기는 놀이가 아닐런지!

주유천하酒遊天下

주유천하酒遊天下 洪 海 里  다 내려놓고 길 떠나저물녘 주막집에 닿으면목로에 걸터앉아막걸리 한잔에 시름 거둘 때, '몰래 잠깐'이란 말 잔에 띄우고가만히 바라보니무언가 간지러운 것이 분명 있을 듯, 사랑 이전의 어떤 여린 것만은 아니라서비린 것의 풋풋함을 지나막 익어가는 맛도 날 법하건만, 붙박이가 아닌흐름흐름 흐를 듯도 한'몰래'라는 말에는 은밀하고 짜릿한 맛이'잠깐' 속에는 자위와 위안이 들어 있어, 웃어도 혼자 웃고울어도 홀로 우는 세상도좋아라, 좋아라. - 월간 《우리詩》 2021. 12월호.

네가 날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네가 날 찾아온 날 나는 내게 없었다 洪 海 里 죽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살기보다 더 힘들다는데 어쩌자고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는가 죽기 살기로 달려들면 밤이 얼마나 환하던가 길은 천지 사방 상하가 따로 없지 않던가 죽는소리, 죽는시늉도 하지 말고 가고 싶은 대로 가고 싶은 데로 가라, 지금 바로 가라 숨 쉬고 있는, 눈 뜨고 있는 지금 여기가 극락이라는데 죽자 죽자 하지 마라 따로따로따따로 하며 크지 않았더냐 밤이 얼마나 환하냐 길이 보이지 않느냐 길은 어디에도 없어 환하다 네가 날 찾아오는 날 나는 내게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