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집『정곡론正鵠論』(2020) 84

회양목

회양목 洪 海 里 눈발이 흩날리는 이른 봄날에 꽃이 피었는지도 모르고 무심하니 지나치는데 걸신들린 듯 벌 떼 잉잉거리는 소리 귀가 소란스러워 뒤돌아 자세히 보니 꽃이 피었다 잎도 작고 꽃은 더 작아 부끄러운 듯 부끄러운 듯 선비 사랑채 앞에 자리잡고 은밀하니 꽃을 피웠다 "참고 견뎌 내라!"고 잉잉대는 벌 떼가 소리칼 잡고 꽃말을 한 자 한 자 새기고 있다. 회양목 동의어 : 황양목(黃楊木), 화양목, 도장나무, 회양나무, 고향나무, box tree

수유역 8번 출구

수유역 8번 출구 洪 海 里 바람 부는 날 나 역에 나가 그대를 맞으리라. 수유역 8번 출구 그대를 처음 만난 곳. 사람들이 물밀듯 몰려 나오는데 그대는 보이지 않네. 한 계절이 그렇게 흐르고 한 해가 저물고 있는데, 눈도 내리지 않고 바람만 부는 한낮. 나 그곳에 나가 무작정 기다리네. 바람은 그날처럼 불어오는데 그대는 오지를 않네. 바로 그때, "열차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한 걸음 뒤로 물러서 주시기 바랍니다!" - 계간《리토피아》2018. 가을호(통권 71호).

대장간 사육제

대장간 사육제 洪 海 里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처럼 단 쇠를 온몸으로 안는 모루처럼 뜨거운 쇠붙이를 잡는 집게같이 달군 쇠를 내려치는 쇠메같이 두드린 연장을 담그는 물구유처럼 만들 연장을 그리는 대장장이같이 시인은 하늘이 눈과 닿아 있는 동안 나무거울 같은 시는 말고 아름다운 세상을 꿈꾸게 할 칼詩 호미詩 작두詩 괭이詩 도끼詩 쇠스랑詩 한 편 한 편 엮는 일 오늘이 세상 끝나는 날인 것처럼! *《우리詩》2018. 12월호 게재. * 대장간에 이런 예쁜 전문용어가 있다니 놀라웠다. 모루 : 달군 쇠를 두드릴 때의 받침 쇳덩이. 쇠메 : 묵직한 쇠토막에 구멍을 뚫어 자루를 박아 칠 때 씀. 어느 분야에서든 달인이 되는 건 쉽지 않다. 도장 찍는 일, 돈 세는 일, 빵 반죽, 국수 늘이는 일, 단순 반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