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지독한 여백 - 치매행致梅行 · 98 지독한 여백 - 치매행致梅行 · 98 洪 海 里 달력을 떼어낸 자리 환하다 벽이 하루하루 바래는 동안 보이지 않는 자리에서 그늘을 껴안은 채 아내는 얼마나 가슴을 졸였을까 홀로 껴안고 있던 그늘의 여백이 평생의 삶을 하얗게 그려 놓았다 때가 잔뜩 묻은 날 씻고 닦을 때가 되었다. 때가..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21
<시> 옷 - 치매행致梅行 · 97 옷 - 치매행致梅行 · 97 洪 海 里 아내는 나의 옷이었다 스물 몇 해 걸쳐 지은 무봉천의無縫天衣 니는 평생 아내를 입고 살았다 이제는, 솔기 터지고 지퍼도 고장난 옷 낡고 해지고 헐렁해진 착한 옷 내가 업고 가야 할 단벌 업고業苦.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16
<시> 느림보경寶經 - 치매행致梅行 · 96 느림보경寶經 - 치매행致梅行 · 96 洪 海 里 상현이 점점 둥글어지듯이 보름달이 조금씩 비워내듯이 둘레둘레 둘러보며 느럭느럭 걸어서 영혼을 찾아가는 단풍나무 길을 지나 햇빛과 물을 다 토해 낸 들녘에서 영원 속으로 걸어갈 때 풀처럼이나 강물처럼이나 혹은 이별을 고하는 각두..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16
<시> 그믐달 - 치매행致梅行 · 95 그믐달 - 치매행致梅行 · 95 洪 海 里 가을이라고 술 취한 사내 밤 늦어 홀로 돌아올 때 휘청거릴까 봐 넌지시 내려다보고 있는 나이 든 아내 젖은 눈빛.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16
<시> 사랑에게 - 치매행致梅行 · 94 사랑에게 - 치매행致梅行 · 94 洪 海 里 목마른 네 육신을 위하여, 기꺼이, 마중물이 되어 주마! 시린 너의 영혼을 위하여, 즐거이, 밑불이 되어 주마! * 막스 베크만, 핑크색 점퍼를 입은 크바피, 1932~34년.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14
<시> 영산홍 한 분 - 치매행致梅行 · 93 영산홍 한 분 - 치매행致梅行 · 93 洪 海 里 오늘은 아내가 조그만 화분을 들고 왔습니다 유치원에서 꽃을 심는 실습을 했나 봅니다 활짝 핀 영산홍이 앙징스럽습니다 눈물이 왈칵 솟구치는데 편지 한 장이 가지 사이에서 피어납니다 나는 이제까지 꽃을 보지 않았습니다 한때 아내는 한 ..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07
<시> 아침 전쟁 -치매행致梅行 · 92 아침 전쟁 - 치매행致梅行 · 92 洪 海 里 거기 또 가야 해? 거긴 왜 가? 거기 왜 가야 하는데? 매일 아침마다 똑같은 질문입니다 되풀이되는 일상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옷 갈아입고 화장해 달라고 2층 딸애 방으로 올라갑니다 가고 싶지 않아? 가지 않을 거야? 대답은 없습니다 소..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4.07
<시> 상처 -치매행致梅行 · 91 상처 - 치매행致梅行 · 91 洪 海 里 사는 일이 서로 상처나 주고받는 일이라서 깨진 바가지 꿰매 봐야 자국은 남기 마련 엎질러진 물을 쓸어 담는다고 다 담으랴 끊어진 끈 이어 놓아도 흉한 매듭은 남고 가슴의 통증은 사라져도 흔적은 있지만 그것은 내가 만든 필생의 작품이 아닌가 누..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3.28
<시>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 치매행致梅行 · 90 그 사람 이름이 뭐더라! - 치매행致梅行 · 90 洪 海 里 휴대전화를 냉장고 안에 넣어 놓고 줄곧 찾는다는 여자 버스 타고 나서 놓고 온 지갑을 찾는 사내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무릎 뒤쪽은 오금 또는 뒷무릎 팔꿈치 안쪽은 팔오금이라 하는데 어깨 안쪽 털이 난 곳을 뭐라 하지 '겨드랑이..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3.25
<시> 아내새 - 치매행致梅行 · 89 아내새 - 치매행致梅行 · 89 洪 海 里 한평생 나는 아내의 새장이었다 아내는 조롱 속에서 평생을 노래했다 아니, 울었다 깃털은 윤기를 잃고 하나 둘 빠져나갔다 삭신은 늘 쑤시고 아파 울음꽃을 피운다 이제 새장도 낡아 삐그덕대는 사립이 그냥, 열린다 아내는 창공으로 날아갈 힘이 .. 시집『치매행致梅行』(2015) 2014.0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