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을 보며 - 치매행致梅行 · 295 단풍을 보며 - 치매행致梅行 · 295 洪 海 里 언제 연두였던가, 그냥 초록이었던가 아니 진초록이었던가, 묻지를 말라! 연두 속에 초록, 초록 속에 진초록을 품어 연두면서 초록이고 진초록이었느니, 사랑이 그렇지 않더냐! 번개 치고, 천둥 울고 벼락 때리는 것이 동시였나니 그렇듯 한평..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21
한치 앞이 어둠 - 치매행致梅行 · 294 한치 앞이 어둠 -치매행致梅行 · 294 洪 海 里 이제는 신발장이 주인을 찾지 않습니다 퍼니 놀면서도 구두 운동화 등산화가 늙어갑니다 옷장도 주인의 얼굴을 잊었습니다 줄줄이 걸려 있는 사시사철의 옷들 문도 열어 보지 않습니다 부엌도 주인의 목소리를 잃었습니다 소마소마 타오르..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20
겨울이 오기 전에 - 치매행致梅行 · 293 겨울이 오기 전에 - 치매행致梅行 · 293 洪 海 里 그대가 오기 전부터 나는 흥분했었네 그대의 고운 발목을 잡고 옷을 벗기고 시체에 달려드는 하이에나같이 때로는 독수리 떼처럼 살부터 내장까지 피 한 방울 뼈 한 개 남기지 않고 알뜰히도 먹어치웠네 가을은 아예 없었네. 산에는 낙엽..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19
그믐밤 - 치매행致梅行 · 292 그믐밤 - 치매행致梅行 · 292 洪 海 里 텅 빈 가슴 배 한 척 띄우고 등대 하나 세웁니다 갈 길이 어디인지 하늘에 묻고 바람 따라 나섭니다 섬 하나 바다에 떠서 뱃고동에 귀먹고 등댓불에 눈멀었습니다 달도 없고 별빛도 사라진 섬 초하루도 그믐날, 그믐밤입니다.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15
쓸쓸한 비 - 치매행致梅行 · 291 쓸쓸한 비 - 치매행致梅行 · 291 洪 海 里 가슴을 풀어헤치고 홀로 울고 있는 마당과부의 울음소리 저민 가슴 지쳐서 절뚝거리는 시린 영혼이 중얼대는 잠언처럼 추적추적 먼저 간 사람을 추적하고 있는 여린 발자국소리 얼굴 볼 수 있도록 옆에 있어 주는 것만도 고마워 마냥 젖고 있는 ..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15
사과를 깎으며 - 치매행致梅行 · 290 사과를 깎으며 - 치매행致梅行 · 290 洪 海 里 햇볕이 내려와 얼마나 핥아 주었으면 이리 붉을까 바람이 와서 얼마나 쓰다듬었으면 이리 반짝일까 보이지 않는 손이 얼마나 주물렀으면 이리 둥글까 환한 가을날에는 배도 부르고 하늘도 참 고와서 내 사랑, 무장무장, 이렇게 눈멀고 귀먹..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09
낼 모레 동동 - 치매행 致梅行 · 289 낼 모레 동동 - 치매행致梅行 · 289 洪 海 里 낼 모레 동동하다 보면 속절없이 하루 해가 다 저문다 해가 진다고 우두망찰하지 말고 화살을 남에게 돌리지도 말라 금간 거울은 버리고 닁큼 손을 내밀어 칼을 잡아라 햇빛에 칼날이 빛나느니 새벽녘 새소리가 꽃으로 피어날 때 우정 모..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09
할 말 없음 - 치매행致梅行 · 288 할 말 없음 - 치매행致梅行 · 288 洪 海 里 이 말을 이제까지 두 번 써먹었습니다 시지詩誌에 신작특집을 할 때 '시작 노트'를 쓰라 하면 정말 할 말이 없어 "할 말 없음!"을 전매특허로 팔았습니다 하루 종일 망연히 누워 있는 아내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어도 묵묵부답! 이것저것 물어 봐도..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10.05
귀뚜라미 - 치매행致梅行 · 287 귀뚜라미 - 치매행致梅行 · 287 洪 海 里 입추가 내일 모레 갈 날이 머잖았다고 대낮에도 숨 가쁘게 울어 쌓는 귀뚜라미 목이 하얗게 쉬었다 투명한 소리탑 한 층 더 올릴 심산인지 밤까지 울력이 한창 새벽녘 마당에 나가 보니 몇 마리가 땅 위에 나뒹굴고 있다 진력하다 힘이 다 빠져 마침내 혼이 뜨고 말았다 나도 귀뚜라미 곁에서 울다 보니 한평생이 다 새어 나갔다.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09.29
아내의 봄 - 치매행致梅行 · 286 아내의 봄 - 치매행致梅行 · 286 洪 海 里 아직 봄도 오지 않은 광 물기도 없는 망사 속 뿌리도 내리지 않고 겨우내 잠들어 있던 마늘 벌써 파랗게 눈뜬 새싹들 아, 눈 시린 뼈들 이 무서운 전신 공양의 찬란한 모성애라니 어둠 속에서도 여린 싹을 틔우고 있었다니 꽃 피고 새 우는 봄이 와.. 시집『봄이 오면 눈은 녹는다』(2018) 2017.09.27